John Kling (1925. 7. 13 - 2015. 10. 5)
이웃 친구 이바의 아버지가 지난 10월 5일
향년 90세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다.
* 10월11일 (일) 오후에 조문이 있었고,
10월 12일 (월) 장례식이 있었어 월요일 휴가내고
위신콘신 미워키에서 있었던 조문과 장례식에 참석하고 왔다.
그 시절 한국에서 태어나신 분들도
일본식민지와 전쟁, 가난등을 겪으시며 험난한 일생을 사셨지만
이바 아버지 또한 참으로 드라마틱한 일생을 사셨다.
아바 아버지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독일계로
(1900년대에 농업기술이 미비한 헝가리가 독일 농부들에게
이민우대 정책을 펴, 동독에 살던 농민들이 집단으로 헝가리로 이주해서
독일타운을 형성해 살았다고)
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에 징집당하기 전까지 헝가리에서 살다
1944년 독일군으로 강제징집당해 헝가리 통역관으로 복무하다 포로로 잡혀,
오스트리아 포로수용소에서 복역하다
48년에 출소되어 부모님과 가족들이 살고있는 동독으로 가 그곳에서 살았다.
(전쟁후 헝가리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동독으로 이주되었다고).
이바 아버진 영특해서 6학년때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키기도 했는데
그때 이바 엄마가 그학교 1학년이었고,
이바 아빠와 엄마는 같은 타운에서 자랐다고.
이바 엄마의 아버지도 독일군에 징집당했는데 전사하셨어
불안을 느낀 이바 외할머니는
당시 미국에 살고있던 아버지에게 연락해
무남독녀인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 정착한 이바엄마는 이바 아버지와 편지로 사랑을 주고받았고,
23살 생일날 고모가 살고있던 서독으로가서 이바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신랑인 이바 아버지와 신랑 가족들은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서독으로 올수있었는데
결혼식후 첫날밤만 지내고 신랑과 가족들은 다시 동독으로 돌아갔다고.
이바 아버진 2년후에서야 비자가 나와 미국으로 올수있었고,
첫날밤만 지낸 신부와 재회할수 있었다.
이바 외할머니가 서독 결혼식에 참석치 못했기에
미국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고.
그러데 청운의 꿈을 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기회의땅 미국으로 왔건만
현실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직장을 구할수도 없었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고, 명석했던 이바 아빠가
특히나 가족사랑이 유별나신 분인데 부모형제와 떨어져
머나먼 이국땅까지 와서는 하고싶은 일은 고사하고
아내를 직장에 보내고 남편이란 사람이 아무 일도 할수 없었으니...
그때 이바아버지가 겪었을 심적인 고통을 알것 같았다.
(헤엄처서라도 동독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고).
이바 부모님은 독일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위신콘신의 미워키에 사셨는데
몇달후에야 이바 엄마의 독일계 친구가 친구에게 부탁해
독일인이 운영하는 베이커리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베이커리가 다른 지역으로 옮겼을땐
그동안 야간에 영어공부를 해 영어도 되고,
워낙 성실하고, 사교성도 좋고해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은퇴전까지 일했던 탄광과 금광등에 필요한 기계를 제작하는
글로벌회사 현장에서 일을 하셨다.
이바 아버진 초등학교 6학년 교육이 전부였지만
머리가 좋으시니 현장에서 수학적인 사고가 필요한 부분들을
알아서 해결했고, 고등학교 나온 직원들을 가르치곤 하셨다고.
3개국어 (영어, 독어, 헝가리어)에 능통하고,
똑똑하고 성실한 아버지가 공부를 하셨으면
정말 어떤 특별한 일을 할수 있었을텐데
(매일 신문을 꼼꼼히 읽어시고 정치와 경제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가족들 부양하느라 아버지가 공부를 하지 못한것에 대해
친구가 많이 미안해하고 안타까와 하곤했다.
그 당시 주변의 많은 독일계 사람들이 영어에 자신이 없었어
뒷돈을 주고 운전면허증을 받았지만
이바 아버진 영어 공부를 해 정식으로 필기와 실기에 합격하셨다.
장모님이 천국으로 가시기전까지 함께 살았는데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정이 많았던 이바 아버진
매주 독일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따로따로 편지를 써서 보냈고,
아들과 딸이 학교에 다니고 부터
토요일마다 독일클럽에서 독일어 수업을 받게해
매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편지를 써게 했다고.
워낙 부지런하셔서 집안이 손갈때가 없었고,
구두도 늘 파리가 미끄러질정도로 반짝반짝했고,
결혼한 딸집에 오면 유리창부터 차고까지 청소를 다 해주시곤 했고,
뇌를 다치시기전까진 미워키 독일클럽에 핵심멤버로 일을 하셨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10년만에 전가족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친척들을 방문하러 동독에 갔을땐
공산 동독이라 물자가 귀해 청바지와 미제 물건들을
가방가방 싸갔다고. 그땐 정말 금의환양한 기분이었을듯.
그리고 한차례 더 동독을 방문한후
결혼 25주년때 부모님과 형제들을 미국으로 초대했는데
하필 부모님과 함께살던 누이동생이 갑짜기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또 딸을 잃은 충격에 몇달뒤에 세상을 떠나
부모님에게 자신이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것이
그분 평생 아쉬움이었을것 같다.
친구에게 말했듯 나도 같은 입장이라 친구 아버지의 삶이 더 이해가 되고
그분이 마음 한곳에 숨겨놓은 아픔과 허전함까지
어렴풋이 알수 있을것 같다.
이바 아버진 제테크도 잘 하셔서 은퇴하셨을땐
노후생활을 충분히 즐길수 있을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 은퇴하고 부인과 유럽으로 여행도 다니고
부부가 함께 노후를 즐기려고 했는데,
결혼 50주년을 보내고,
그 다음해에 말기 자궁암으로 아내를 천국으로 먼저 보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후 충격이 컸지만
혼자서 잘 지내셨는데, 6년전 뇌졸증 증상이 왔고,
뇌 수술을 받으셨는데 이후부턴 계속 상태가 악화되어
아들부부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함께 지냈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하시긴 했지만
질병으로 인한 신체고통 없이
먼저 보낸 자식없이, 아들딸이 잘 살고 있고,
돌아가시기전에 아들, 딸과 손자, 손녀들과
작별인사도 했고,
부인 생전에 아내에게도 잘해
천국에서 기다리던 부인과
반갑게 재회하셨을테니
아버지를 잃은 친구에게 위로가 되었슴 좋겠다.
Mr. & Mrs. Kling
카톨릭신자로, 당시 카톨릭은 피임을 금지해 신자들 대부분이 자녀들이 많았는데
친구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 혜택을 주기 위해 아들과 딸 둘만 낳았다.
친구도 친구오빠도 각각 아들과 딸 둘씩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무남독녀셨고, 아버진 혼자 미국으로 오셨기에
외로와서 자녀들을 더 많이 낳고 싶었을수도 있었을텐데
참으로 현실적이고 현명하신것같다.
서른에 미국으로 오셨는데 어느새 90세 노인이 되신 친구아버지
말도 안통하는 낯선땅에서 굳건이 뿌리를 내리고
가족들에게 사랑과 물질을 부족함없이 주셨고,
지역사회 독일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셨다.
비록 한해 몇번씩 만났지만 만남과 인연을 통해
친구 아버지의 삶을 만나게 해 주신 축복에 감사드리고
지난 7월 90세 생신때 하룻동안 함께 할수있었던것이 위안이 된다.
이바 외할머니와 부모님이 계신곳
아파트식으로 칸칸에 관이 보관되어있다.
천국에서 그리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영생하시길!
2015. 10. 16. (금) 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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