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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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나와 가족들

내 이야기 - 버스안내양을 꿈꾸다

앤드류 엄마 2010. 2. 7. 15:26

할아버지는 손자볼 생각에 아들을 일찍 결혼시켰다.  그래 엄마가 임신을 했을때할아버지는

엄마뱃속의 아기가 당연히 손자일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당시로선 엄청 비싼 한약까지 사주었다  

같은해에  나보다 먼저 우리 .뒤집과 옆집들까지 아들을 낳았는데 (그해 우리동네는 아들이 흔했는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훨씬 많다) , 엉뚱하게 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하늘을 원망하며 평펑우시고는

화가나서 일주일간 가출을하셨단다.   

 

우리동네는 행정구역상은 읍이지만, 읍에서 3키로 떨어진 창녕성씨와 김영김가의 집장촌으로

남존여비가 엄청심했다.   특히 우리집은 더더욱.

3키로 떨어진 읍내도 걸어서 다녔고, 버스타고 어딜 가본적이 없으니 버스가 타고싶어 어릴때

꿈이 안버스내양이었다.  아버진 이왕이면 스튜디어스 하라고 하셨는데, 난 그때부터 현실적

이었는지, 스튜디어스는 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이루어질수 없는 꿈이라 그냥 말이라도 할수가 없었다.

 

어릴때 우리골목엔 나와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여동생을 제외하곤 전부 남자아이들뿐 이었

(바로 아래 남동생은 나보다 4살이나 어리다).  놀기시작할때부터  그들과  구슬치고, 딱지치고, 깡통차기

하고, 자치기를하고 놀았는데다, 엄마 뱃속에서었던 비싼한약기운까지 받았으니 여자답지 못했던것이

당연한것인데, 수시로 할아버지한테  선머슴처럼 뛰다니지 말고 조신조신다니라는 꾸중과함께 

씨잘데없는 가스나 라는 말을 들어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래 12년동안 학교다니며 손들어서

책한번 읽은 적이 없었다. 

 

 겨우 이름 석자 삐둘삐둘 적을줄 알고, 열까지 헤아리는것을 배워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때 무료급식으로 빵을 주었는데, 분명 반아이들에게 하나씩 주어야하는 빵인데도, 담임선생님은

공부잘하는 아이 두개주고, 심부름온 자기아들 하나주고, 공부못하는 아이들에겐 주질 않았다. 

이름밖에 적을줄 모르는데다 집에서 누가 따로 공부를 시켜주지도 않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으니 공부를 못해 빵을 못받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빵을 받게되면 동생들과 나누먹을

생각에 3키로가 되는 먼길을 신나게 왔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소풍,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50원을 주셨다.  그돈으로 좋아하는 소라과자 한봉지를 샀는데, 동생들과 나누먹으려고 조금만 먹고

아껴두었는데, 물통에 물이 떨어져 물뜨러 갔다오니 누가 훔쳐가고 없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할아버지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학교에 필요한 돈을 할아버지한테 받아야했다. 

어쩌다 친척들이나 고모가 친정왔을때  주었던 용돈외엔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집에서 용돈을

받은적이 없다.  아이들이 사먹는 사탕이 너무 먹고싶었던지, 구슬이 필요했던지  동생 돼지저금통에서

몰래몰래 돈을 꺼내다가 나중에 탈로나  혼이 났다(남동생은 할아버지의 손님이 오시면, 꼭 손님께 인사

시키고, 켵에 두었기에 동생은 손님한테서 돈을 받을때가 많았다).  그때 국민학교 육성회비가 180원이

었는데, 할아버지는  200원을시면서 20원을 저금하게했다.  20원을 용돈으로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니면 5원이라도하이튼  저축란에 도장은 많았지만 금액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때 깜빡잊고 공책살돈을 받아오지 않아, 친구가 두장인가 사용한 공책을 내일 새것으로

사주겠다고 빌렸다.  다음날 할아버지한테 공책값받아서 그친구한테 새공책을 사주었는데, 학교갔다와니

할아버지가 공책산것 보자고 하시기에 친구공책을 보여주었더니, 벌써부터 거짓말한다고 마당빗자루로

몇대나 맞았다.  얼마나 억울하든지  

 

할아버지는 남동생을위해 영양제 비오비타를 사주었는데,  난 그것이 먹고싶어 몰래 하나씩 꺼내

먹었는데, 영양제 안에 들었던 제습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뜯어보았다가 비오비타와 썩여서 혼이났고,

학교앞에서 파는 뽑기(스텐레스 국자에 설탕녹여서 소다부어, 무늬를 찍어 바늘같은것으로 깨지않고

성공하면 큰 설탕과자를 상품으로 주는것)  가 너무 하고싶었는데, 돈이 없으니 엄마가 숨겨놓은 

귀한 설탕찾아서 (그때 난 엄마와 고도의 심리전을 해야했다 - 엄만 내가 찾지못할곳에 설탕을 숨겨야

했고, 난 어디에 엄마가 설탕을 숨겼는지 엄마의 그런 마음을 예측해야했기에) 몰래 만들어 먹다가

국자를 쌔까맣게 만들어 엄마한테 발각되어 혼이 났다.   그래도 끝까지 한번도 발각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과자를 사서 할아버지 방에 자물쇠로 잠긴 농에 그 과자를 넣어두고,  남동생한테만

주었는데,  할아버지가 집에 오시지않는날엔 사랑방 청소하러 갔다가 숨겨둔 열쇠 찾아내어 표시나지

않게 인터벌을 두어서 꼭 하나씩만 먹었기에 할아버지는 과자가 줄어든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공부하기싫어하고 학교가기 싫어하는 앤드류에게, 엄만 네가 부럽다며   학교가는날이 일요일보다

좋아다며 종종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마치고 집에오면 학교숙제보다  먼저 소꼴(소풀)을 베러가야했다. 

 그런데 풀이 많은곳은 뱀이 나올까봐 겁이나고(당시 소풀뜯다 독사한테 물려서 손가락 잘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아직도 뱀을 가장 무서워한다), 조금있는곳은 한자루채우기가

너무 힘들었다.   방학때면 집근처에 풀이 없어 엄마와함께 리어커끌고 먼곳까지  소풀베러 갔다.

동네아이들은 소먹이로 근처산에 함께 가서는  소는 소끼리 풀어놓고, 아이들끼리 엄청  재미있게

노는데할아버지는 그런곳엔 소가 먹을것이 없다고 못가게했다.  그래 아이들이 한명도없는곳에서

정말 심심하게 할머니와 둘이서 소를 먹여야 했는데, 한번은 할아버지가 출타중일때 몰래 아이들이

노는 산으로 소먹이로 가서는 놀다보니 소가 없어져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고, 산에서 뱀이 나를

쫒아와 혼이 났던 적이 있다.

 

 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때 부산의 고모집으로 유학을 갔다.  내가 남자로 태었났다면 난 서울

고모네로 전학갔었을테고, 고종사촌들이 일류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니 나도 그 영향을 받아 내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70년대 초까진 이사가지 않더라도 행정구역 상관없이 서울도 전학이 가능했는데,

70년대중반 부터 같은 행정구역안에서만 가능했다.  그때 부산은 특별시가 아니라 경상남도

도청소재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잔듸씨가 돈이 되는때가 있었다. 돈이 필요했던 엄마와 나는 동네 사람들 몇명과

된장과 김치가 전부인 점심밥(현지에 있는 남의 고추밭에서 고추몇개따고 작은 서리도 엄연히

불법인데)  준비해서 잔듸씨 훓으러 다녔고,  중학교땐가 고등학교땐 감자와 양파작업장에 몇번따라

왠종일 일하고 일당으로  3천원을 받았다.

 

오일장을 맞아 할머니가 장을 봐와도 할아버지 반찬과 생선몇마리와 필요한것들만 구입했고,

 나머지가족들의 식단은 자급자족이라, 야채도 밭에서 심은것만 먹어기에,   초등학교 5년때인가 방학때

 부산에 사시는 고모집에 갔다가 처음으로 당근을 먹었다.  고종들이 시력이 좋지 않아 고모는 당근이

 시력에 도움이 된다고 간식으로 먹였는데, 그전까지 빨간고추가 맵기에 빨간색은 매운줄알고

 있었다.   그래 고종들에게 매운것을 어떻게 먹느냐는 엉뚱한 말을 고모네 가족들을 웃겼고,

우리집 우물물과는 달리 수도물이 미끄러워 아직도 비눗물이 씻기지 않은줄알고 눈감고 한참 세수하다 한차례 고모가족들을 웃겼다.  그때가 처음으로 도시를 갔을때였는데, 그전까지는  도시사람들은 공장에 다녀 낮에는 사람들이 없는줄 알았는데, 한낮에도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은 다들

공장에도 다니지 않고 어떻게 살까 궁금했다.    부산고모네는 언니와 학년이같은 사촌과 한살아래

사촌도 있고, 집이 서면위에 있어 걸어서 서면에도 가고,  용두산공원근처의 먹자골목을 가기도해, 

방학때 가장큰 즐거움이 부산 고모집에 가는것이었다.  그리고 비록 가난했지만 외갓집 근처 큰냇물에서 외사촌들과 수영도하고 재미있게 놀았기에(우리동네는 시골이지만 수영할곳이 없었다)  외갓집에 가는것도 즐거움의 하나였는데,  아마  일을하지 않아서 좋았던게 아닌가 싶다.  5,6학년때 학교마치고 여자아이들끼리한 오징어 육지놀이 또한 어린시절의 즐거움중의 하나였던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때  학교 배구선수를 했는데 시합마치고 학교에서 짜장면을 사주어서 처음으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시간들까지 없었다면 어린시절은 너무불우했을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먼길을 초등학교 입학식날부터 비가오나 눈이오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나 싶다. 

2010. 2. 6.  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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