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미국에서 보통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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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들

내 이야기 - 영어와의 악연

앤드류 엄마 2010. 2. 9. 14:23

1학년때의 기억때문인지 초등학교내내 내가 한번도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는지,  우수반에 뽑혔다(몇개월후 정부지시로 우수반 해체하고

반배정을 다시받았지만).  그런데  문제는 중학교부터 시작되는  영어였다.   

읍에사는 친구들은 겨울방학부터 벌써 영어과외를 받고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교는

사립학교였는데, 이사장이 학교를 설립한것이 교육을 위한것이 아니라 사업의 일환이었기에,

교사들대부분이  사대출신이 아니었고, 일부중엔 초급대 출신들도 있었는데다 교사들이

자주바뀌었고, 학습지도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교사들도 많았다.   영어선생님또한  발음기호를

보고 읽을수 있게 파닉스부터 가르쳐 주어야 했는데, 파닉스도 가르쳐주지않았고, 선생님이

읽을때 한글로 적게되면 발음이 엉터리가 된다며 책에 적지말라고 하셨다 (난선생님말씀은

따르는 범생이였기에 그렇게했다).   당시 영어단어장이 50원했는데, 할아버지는 학생은 교과서만

있어면 된다고 믿기에, 단어장을 구입할 돈을 주지  않으셨다.  미국은 학교에서 사전찾는법부터

가르치는데, 우린 사전찾는법도 몰랐고, 사전이라는것이 있는줄도 몰랐다.  읽을수 있는 단어

몇개를 제외하고는  주소는 address 이렇게 스펠링하나하나로 외워야했는데, 단어시험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우수반에서 빵점을 받을수는 없기에,   궁리끝에 아이들이 외우는것을

듣고있다 필통에 컨닝종이를 만들었다.  근데 첫컨닝이라 너무 서툴렀던지 실장인 경남이한테

들켰다.   그때 너무챙피해 이후 무슨일이 있었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어시험 점수도. 

그날 이후 모르는 단어는 선생님이 읽으실때 한글로 열심히 적었고, .하교길 1시간을 항상

단어를 외웠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영어문법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과외를 받고 있는 아이들이 알고 있었고, 모르겠다고 손들고 질문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는 중학교내내 가장 어려운 과목되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여자는 공부하면  집안 분란만 일으키기 때문에 공부하면 안된다고 하시는분이라,

학교공부보다 집안일을 우선으로 해야했기에 항상 농번기때면 성적이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항상 군사부일체라며 선생님은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셨기에,

중학교때까지 선생님말씀이라면 팥이 콩이라도 믿어었다.  봄소풍전날 선생님께서

내일 용의검사를 한다고 했다.  당시 교칙이 귀밑 1센치였는지 1.5센치였는지 하이튼 무척

짧았는데, 내머리가 긴것같아서 아침에 밥하고 소죽까지 끓여야하는 바쁜 엄마한테

머리 잘라야한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급하게 머리를 잘랐는데, 오른쪽 자르고나면 왼쪽이 조금

길고, 그래서 왼쪽 자르고 나면 오른쪽이 조금 더길고, 나중엔 머리가 귀위 1센치가

올라가버렸다.  하필 소풍가는날에.    

 

학교가면 아이들이 테레비젼 드라마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 우리집엔 할아버지 방에만

텔레비전이 있었는데,할아버지는  9 뉴스까지만 보고 텔리비젼을 끄니,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할수가 없었고, 집에 라디오 한대있는것도,  일할때 들고다니면서

넘어뜨리곤해  고장이 잦았다.  학교도서관에서    빌리기가 쉽지 않았고,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 했기에 창녕읍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수있는것도 몰랐다.  시간도 없었지만. 

그러니 나의 10대는 문화생활과는 엄청 거리가 멀었고, 항상 읽을거리에 목이 말랐다. 

 

중학교 수학여행갔을때  밤에 엄마 보고싶다며 우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좋았는데.   학교갔다오면 텅빈집에 내가 해야

일들만 잔뜩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마치면 곧장 집으로 왔기에 본의 아니게 때문에

동네 친구들이 나때문에 부모님한테 혼이 났다.  경란이는 언제왔는데 뭐하고 이제오냐면서. 

 

도시로 전학간 동네 남자아이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오면 밤에 모여 놀곤했는데, 할아버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며 남자아이들과 놀게했다.  다들 집안 아제뻘들인데.  그래 가끔씩은

밤에 담을 넣어서 들어오곤했는데, 못가는 날이 많았고, 동네아이들도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기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여름방학땐 창녕장날마다 비가오지 않음 교복입고 소를 몰고 장에 가야했는데, 정말 싫었다  

남편한테 이야기했더니 소를 타고가지 힘들게 걸어갔냐고했다.   말타듯 소도 탈수있다는

생각을 못했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도 아무도 소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없기에

감히 계집아이가 소를 탈수는 없었겠지만.

 

한번은 처음으로 밭에 수박을 심었다.  그런데 사방 10키로메타안에 우리집만 수박을

심어 서리꾼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아버지가 밤에 원두막을 지어 보초를 섰는데,

하루는 먼동네 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서리하러 왔는것을 아버지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각본상 그들이 도망을 가야하는데, 도망을 가지않고 아버지를 공격해

주인이 도망을 갔다.  화가나신 할아버지가 다음날 수박을 몽땅 수확하게 해,

엄마와 내가 리어커에 수박을 싣고 읍내에 팔러 갔는데, 사람들이 사기전에 익었는지

확인해달라고 해 확인을 했더니 그렇게 큰 수박들이 익은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박장사하면서 익은수박 선별하는것을 몰랐으니 그해 고생해서 수박농사지은놓고

수박을 하나도 팔지도 못했고, 소 먹이로 다 주었다.

 

한창 수줍고 부끄러움 많은 사춘기를 난 10대 소녀의 일상과는 너무 다른 일상을

살아야 했다.  잊고싶었던 컨닝사건과 소몰고 장에 갔던 기억까지 돌아갈수없는

그시절이기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2010. 2. 8  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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