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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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야기

앤드류 엄마 2010. 2. 6. 13:57

엄마의 고생길은 시집오는날로 부터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결혼시킬때 딸은 조금 더 있는집에 시집보내고, 며느리는 살림이 없는 집에서

데려와야 시집에 순종하다는 이상한 기준을 가지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순전히 손자 빨리 볼 욕심에 19살 아버지를 한살 연상인 엄마와 결혼시켰는데,

엄마는 할아버지의 그 기준에 해당되는 집안의 딸이라 할아버지에게 낙점을 당했다.

결혼 당사자인 아버지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나의 외조부와 외조모는 중매장이가 준 사진과 부잣집의 장남이라는 말만 듣고 엄마를

아버지와 결혼하게했다. 

 

신랑신부 예복구입하는날 아버지와 첫 대면을 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아버지가

생각보다 키가 작은데다 절뚝거려 엄청 놀라고 실망을 했다고.

아버진 난생처음으로 사촌의 구두를 빌려신고갔는데, 사촌이 발이 작았는데다,

20키로 이상을 걸어갔기에, 발뒤꿈치가 다 까여 아파서 절뚝거렸다고.

 

엄마는 결혼식마치고 당시 풍습에 의해 1년을 혼자 친정에서 살다가 반은 걷고, 반쯤에서

택시타고 부잣집이라는 시집엘 왔더니, 호랑이 보다 엄한 시아버지에, 병약한 시어머니,

그리고 미혼인 시동생, 시누이와 두명의 머슴까지 첫날부터 지금처럼 입식 주방도 아닌 흙바닥

부엌에서 불때서 밥하고, 반찬준비하고, 식사때마다 상을 몇개씩이나 차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보온이 되는 밥통이 있는것도 아니고, 전자렌지가 있는것도 아니어서

시아버지에게 따뜻한 밥을 드려야하는데, 저녁 귀가시간이 일정치 않으니 한시간에 한번씩

짚불을 피워 밥을 데웠단다.  

그리고 산떠미처럼 많은 집안일하면서 들일까지 해야 했으니 자정전엔 자본적이 없다고.

 

호랑이 보다 더 무서웠던 시아버지는 멋쟁이라 갓쓰고 두루마리를 입고, 여름에 모시옷을 입었기에,

그 바쁜와중에 풀먹여 방망이질해서 빳빳이 대령해야 했는데, 어느 비오는날 하루는 꼴머슴

엄마가 쇠경받으러 와서 엄마가 그분 저녁해준다고, 할아버지한테 우산을 갔다 드리지 않아

집에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는 두루마리를 흙마당에 벗어 던져다고,

엄마는 그날밤 그 옷을 씻어 다음날 할아버지가 입고가게 준비하느라 새벽에 잠깐 눈을 붙였다.

그때 아버지는 군대에 계셨는데, 엄마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때를 견디며 살았나 싶다고.

그때 글을 알아 일기를 적었어면 한도 없다고 하시며, 그때 생각에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괜히 옛날 이야기 물었다가 엄마를 울렸다.

   

어떻게 며느리한테 그렇게 할수가 있는지, 밖에선 인격자인양 하면서 집에선 안하무인이셨던

할아버지, 가족들에게 좋은기억은 하나도 물려주지 않은분이라 아무리 시대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자는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여자가 몇명이나 되는지? 

일할수 있는 직장이 없으니 혼자 살수가 없어 생긴 비극이겠지만.

 

빨리 손자 볼 욕심에 아들을 일찍 장가보냈는데, 엄마가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렸던 손자가 아닌

손녀(나)를 낳자 할아버진 일주일동안 가출을 했다고.  그러니 산후조리는 언감생신이었다.

엄마가 또 딸을 낳았으면 아마 할아버지한테 쫒겨났을거란다. 

할아버지는 고모들이 생신때와 명절후 빨리 친정에 오지 않는다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엄마는 친정에 잘 보내주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내주면 한밤만자고 다음날 와야했다.

외할머니도 딸시집보내고 할아버지가 어려워서 평생 두번인가 세번을 다녀가셨다고.

친정엄마가 와도 엄마가 돈이 없으니 용돈하나 못드린것이 평생 한이되어 가슴에 맺힌다고.

방학때 내가 외갓집에 가려고 하면 할아버지는 가난한 외갓집에 뭐하러 가냐며 꼭 한마디하셨다.

남들의 평가를 엄청 중요시 하는 할아버지는 제사상도 남보다 커야했고, 당신 생일은 잔치를

해야했고, 죽이나 밀가루음식은 절대 드시지 않으셨기에, 꼭 밥을 해야했고, 반찬은 절대 아무거나

드리지 못한다.  그랬다간 바로 밥상이 날아가기에. 

손님은 또 얼마나 청하는지 엄만 수시로 술상을 차려야하니 손이 마를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경제권이 없으시고, 시장도 할머니가 가셨기에 엄만 돈이 없었고, 외출도 못했다.

엄마의 외출은 1년에 세번 (추석, 설날, 그리고 외할아버지 제삿날) 가는 친정방문과

내 초등학교 운동회가 전부였던것 같다.  어떤해는 할머니가 참석하기도 했다.

엄만 내 고등학교 졸업식때에서야 처음으로 자녀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렇게 고단한 엄마의 시집살이는 강산이 두번바뀌고

할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시고 난뒤 조금씩 나아졌다.

일단 할아버지의 시중에서 해방이 되었고, 

부엌도 입식 주방으로 개조했고, 내가 취직을 해 냉장고와 가스렌지, 세탁기등의

가전제품들을 하나씩 구입해 엄마의 일손을 들어주었고, 텔리비젼이 안방으로 옮겨왔다.

 

그래도 농사가 많아, 특히 우리집은 밭이 많은데, 논일은 기계로 하지만, 밭은 손작업이

대부분이고 또 고추와 참깨, 콩수확을 여름에 해야하니 겨울한철 제외하고 1년내내 바쁘다.

바쁠땐 아침 5시에 전화하면 벌써 일나가고 없다.  해도 뜨기전인 4시 반에 나가서 9시 반에서야

돌아와 저녁먹는단다. 토.일요일도 없이. 

그러니 그동안 무리한 결과 이제 엄마도 어깨, 팔, 다리 아프지 않는곳이 없다.

사촌 올케가 "큰 어머니같으면 전 아침에 눈뜨기가 싫을것 같아요한다, 해도해도 일이 끝이 없기에."

엄마도 이젠 본인 몸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꼈는지, 일하기가 싫은데 아버지가 하니 어쩔수없이

같이 한다고 하기에, 엄마 그러면 아버지한테 아파서 병원간다고 말하고, 병원비 받아서

맛있는것 사먹고, 놀다 오라고 했더니 어째 그라노 하신다.

엄마, 여자는 여우가 되어야 하니 내 말대로 좀 하라고 했는데도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서인지 없는 말을 못한다.

 

우리집 보일러 넣을때 주방에 보일러를 깔지 않아 겨울이면 엄청 춥다.

그래 주방에서 일하는것이 서글퍼서 다시 공사 좀 하라고 했더니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만구편하단다.

세탁기가 오래되어서 마지막 헹굼이 되지 않아 이제 좀 바꾸라고 했더니

예전에 손빨래 하는것에 비하면 이것도 감지덕지란다.

뭐든지 옛날 그 어려웠을때와 비교하니 엄마는 불평이 없다.

아버지만큼 일했으니 수입의 반은 엄마 몫이니 아버지한테 말해서

평소하고 싶은것 하고, 먹고싶은것 사먹고, 사고 싶은것 사면서

살아라고 해도, 평생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았던 엄만

그렇게 일하고도 권리 주장을 하지 못하신다.

꼼쟁이 아버지 땜에 당신 마음만큼 남한테 베풀수가 없어

속이 상할때가 많다.

 

그래도 창녕군내에서 엄마, 아버지만큼 해외 여행

많이 한 사람들이 없을거라는 큰 자랑거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하도 일을 해서 손톱이 닳아 깍을일이 없으신 엄마,

이젠 아버지가 일을 하고 싶어도 예전처럼 일을 할수 없을테니

제발 아버지일까지 하지 말고, 아버지와 함께 편안하게

노후를 즐기시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 다음에 데이빗이 제 앞가름하게되면

그렉이 한국가서 근무 몇년할테니

그때 엄마모시고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것 사드릴께요.

앤드류결혼식도 참석하고, 예쁜 손주며느리도 봐야죠.

그러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2010.  2.  5.  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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