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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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들

의지의 미국 아줌마, 내친구 린다

앤드류 엄마 2012. 5. 28. 05:31

 

4년전에 블로그 시작할때 한꺼번에 올린글인데 오늘 린다이야기를 하게되어 다시 올립니다.

 

 

4년전 2008년 12월 21일 위신콘신주 메디슨, 영하20도에 시속 45키로 강풍이 부는
그 혹한의 날, 린다의 위신콘신 주립대 대학원 졸업식이 있었다.
친구 졸업식을 지켜보면서 난 내가 졸업하는것처럼 가슴 벅찬 감격과함께,
지난 2년 6개월간의 린다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어린 아이셋을 둔 싱글맘 린다는 학교 도서관의 정규일을 하면서 토요일엔
또 지역도서관에 근무하고, 한달에 한번씩 일요일에도 근무를 해야 했다.
그래 린다가 대학원을 진학한다는 소식을 전했을때 축하해주었지만,
무사히 졸업할수 있을지 걱정부터 되었다.
더구나 대학원은 학점이 B-만 되어도 낙제된다고.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결혼후 전업주부로 10년을 살았기에
이혼후 직장을 구하려 했을때 전공관련 직장을 구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려 보다 좋은 직장을 찾아 이사할수도 없었다.
이사하게되면 급히 도움이 필요할경우 부탁할 사람이 없기에.

 

친정가족들이 사는곳은 경기가 좋지않아 직장도 없었고,

친정 부모님두분다 오랜 병환으로 집밖외출이 어려워 린다 오빠가 근처에 살면서
부모님을 도와주고 있기에 자기 아이들까지 부탁할 입장도 아니었다.
또한 세 아이들 방과후 특별활동 차량스케쥴을 고려해야하니 인근에 직장을구해야했는데,
시골이라 일자리가 많지않아 아이들학교의 보조사서직을 구했다.
그런데 시급이 최저임금에 가까운 8달러라 그녀 생활은 시간만큼이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이런 현실에 대학원을 진학했으니, 그 이후생활은 역경그 차체였다.

첫날 수업에 참석했더니 자기만 제외하고 다들 노트북을 가져왔단다.
자긴 집에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는데.
대학원은 첫학기만 출석수업이고, 나머지는 인터넷코스였는데,
과제물은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야해, 학교 교장선생님께 사정을 설명드렸더니
학교인터넷사용을 허락하셨다고.
그래 아이들을 제우고 학교도서관가서 숙제를 했는데, 어떤날은 마치고
시계를 보면 밤 2시였다고. 

6개월뒤 국가연금으로 지내는 부모님이 도와주어서 인터넷을 연결하고부턴
시간적으로 훨씬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매일 자정을 넘겼다)

 

책값이 없어 책을 구입하지 않고, 대출을 이용했는데(학교에 한두권밖에 없다)
어떤날은 이미 대출한 뒤였기에, 과제물을 마감 몇분전에 제출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평상시는 친구들과 전화통화할 시간도 없었다.
와중에 미식축구하는 둘째아들이 연습과 경기중 세번이나 응급실로 실려갔고,
한번은 손목이 부러져 수술을 했는데, 같은시기에 막내아들까지 손가락이 부러졌다.
그러나 지난 2년 6개월중 친구를 가장 괴롭힌것은 이런문제들이나 생활고가 아니라
본인의 성적 스트레스였다.
낙제하게되면 학자융자금 (50,000달러) 이 취소되고, 이미 사용한금액을 반환해야하는데,
갚을 길이 없으니, 집이 차압당할거고, 친군 파산하게되기에.

어느날은 길을 잃어 몇 시간을 헤메다보니 기름이 다 떨어졌는데,
지갑을 보니 몇달러밖에 없었다고. 신용카드는 초과지출을 우려해 없앴다.
그래 혹시 누가 길에 떨어뜨린 돈없나 열심히 길바닥을 찾았더니
20달러를 주웠다고, 기적이라며 들뜬소리로 나한테 전화했다.
그 와중에 13년을 사용한 밴이 엔진 작동을 멈추었다.
그래도 집앞에 와서 멈추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그동안 우리가족한테 참 잘해주었다며 고마와하는것을 보면 할말을 잃게 만든다.
그래 중고차를 구입했는데, 크레딧이 좋지 않으니 이자가 얼마나 비싼지...

올 새해에 방문했더니 온수 보일러가 고장났다며 물을 끓여서 사용하고 있었다.
린다가 그나마 이렇게라도 버틸수 있었든것은 아이들이 여름방학때마다
근처 옥수수밭에서 일해서 번 돈을 린다에게 주었고, 적으나마 친정가족과
친구들의 금전적 도움과 간절한기도 덕분이리라.
난 그동안 별 여유는 없었지만, 내가 가진것에 감사하며 살았는데,
린다가 학교시작하고부터 나의 무능력과 더 많이 돠와줄수없는 현실이 답답해졌다.

예전에 린다가 나에게 나처럼 용감한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며, 다음에 꼭 내 이야기를
책으로 내라고 했는데, 졸업식에서 린다에게 이 말을 해주고, 넌 나의 영웅이며,
넌 미국사람들에게 또다른 Pursuit of Happiness 의 표본이라고 말해주었다.

대학원 시작하기전 나이와 시간, 돈 어느것 하나 여유있는것이 없었기에 망설였을때,
친정엄마가 학교다녀도 2년 6개월뒤엔 45살이 되고, 학교 다니지 않아도 그 나이가 되고,
학교다니지않아도 돈과 시간이 없기는 마찮가지인데, 학교를 마치게되면 너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나을테니 시작해보라고 했단다.

그 힘들었던 2년 6개월간을 마친뒤 린다는 이제 시급 8달러에서 초봉 4만 5천불인
전문사서직의 자격을 갖추었기에 모두들 어려운이때 린다는 더 밝은 미래를 확신할수
있게 되었다.

린다에게 그 어려웠던 시간들이 희망이 있었기에 극복할수 있었듯이
전세계적인 경제난으로 다들 어려운이때, 우리 모두 린다처럼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겠다.
린다가 하루속히 원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되길 간절히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