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미국에서 보통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미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나와 가족들

우린 그시절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앤드류 엄마 2010. 2. 12. 01:32

그동안 워낙 검소하게 살아 절약이 몸에 베였는데다 부모님을 저축을 많이 하라고 하셨기에,

3달 동안 수습기간이라 월급을 70%만 받는데도 바로 적금을 들었고, 정식되고나선 또 추가로

적금을 들었기에 너무 무리를해서 늘 돈이 없었다.  

83년 3월에 입사했을때 세달후 정식으로 받은 첫 급여가 124,000원였고, 세달마다 보너스

(기본급100%) 나왔는데, 세금을 공제하고나면 보너스를 받아도 20만원이 되지 않았다.

그땐 20만원이 꿈의 숫자였다.

 

농산물 가격이 워낙 싸서 비료값등 재료비를 제외하면 내수입이나 우리집 수입이나 비슷했다.  

우리부모님은 그많은 토지자본에다 주말도없이 주 7일에 하루 12시간이상을 일했으니 시급으로

계산하면 그 힘든 일하시는 부모님 두사람의 노동의 가치가 나와 비슷했다.

차라리 두분다 회사 청소부를 했으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데서 일하면서 주말엔 쉬기고하고,

수입도 훨씬 많아 (그땐 청소부들에게도 자녀 학자보조금으로 중.고등학교수업료 전액과

대학학비의 80%까지 지급했다), 더 인간답게 살수 있었는데. 

 

회사에 기숙사가 있어 남동생이 고등학교오기까지 6년간 기숙사생활을 했다.

기숙사는 2인 1실에 에이스침대까지 갖춰져있었고 시설이 좋았으며 난 처음으로 침대생활을했다.

그전까지 옷을 사주지 않아 학교체육복, 교련복, 엄마 몸빼바지등을 입고있었기에,

당장 퇴근후 기숙사에서 입을 마땅한 옷이 없었다. 

혼자 물건 사본적이 없으니 꼭 옷 살때마다 바가지를 씌어고 (그땐 정찰제하는 매장이 없었다)

또 잘못구입해 나랑 별로 어울리지 않아 촌티를 날렸다. 

자취를 했으면 또다시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텅빈방으로 돌아가 혼자 적적히 지내야했을텐데,

기숙사 생활을 하니 퇴근후 함께 할 사람들이 있어 좋았다.  

 

기숙사거주자들은 대부분 시골출신들에다 창원과 마산에 사는 여직원들보다 더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라 서로를 잘 이해했기에 더 가까이 지냈다. 

기숙사비는 한달에 5,000 원밖에 하지 않았는데, 식권이 550 원이나 했다. 

한달내 회사에서 밥먹었다간 적금넣고 남은돈은 모두 식비로 지출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래 지출을 줄이기 위해 한달에 식권 10장만 구입하고, 아침은 우유에 미숫가루

타서 먹는것으로 대신하고, 저녁은 기숙사에서 사용이 금지된 전기난로로 라면을 끓여먹든지

(너구리와 안성탕면 정말 많이 먹었다.  그래도 라면이 질리지 않으니 참 신기하다)

기숙사에 냉장고가 없기에 집에서 가져온 마른 밑반찬 한두개로 해결 하기도 했다.

 

기숙사 휴게실에 한대있는 티브를 함께 시청하면서, 슬픈영화가 방영될때면 휴게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함께했던 시간들이 많았기에 그땐 개인 사생활이라든지 비밀같은것이 없었다.

혜란이 언니는 사무실도 이웃이었고,  기숙사도 이웃이라 거의 매일 붙어 지냈다.  

 

신용카드가 없었던때라, 멋쟁이 언니들은 그 비싼 3만원짜리 엘칸토구두를 3개월 월부로

구입해 신기도 했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여사원들이 3만원하는 선풍기 살돈이 없었어

여름마다 더워서 자다가 몇번이나 샤워를 했고, 수건에 물적셔 덮고 자기도 했다.

경비아저씨가 계셨지만, 혹시 남자들이 밤에 칩입할까봐 창문을 꽉꽉 닫아 통풍이 되지 않았다.

그래 에어컨나오는 사무실에 일하면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점심먹고 잠깐 낮잠을 자기도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너스받아 집에 냉장고사주고, 가스렌지사주고 했는데, 왜 선풍기는 못샀는지?

(아마 냉장고와 가스렌지는 꼭 필요한것인데다 매일 사용하는것이지만, 선풍기는 여름한철용이라

 참았겠지만)   

조금 덜 저축하고 좀더 여유있게 살았으면 좋았을것을.

  

입사할때 창원공단에서 급여와 복지가 가장좋았던 회사는 1년 지난뒤부터 적자를 이유로

4년째 월급이 동결되었고, 보너스도 제때 나오지 않아 가끔씩 부모님께 빌리기도 했다. 

월급나오는 날(그때는 현금으로 지급했다) 지갑털어 땡파티를 하기도 했는데, 고작 초코파이와

에이스정도였다. 

가끔씩 언니들과 외출을 가면 경양식집에가서 돈까스먹고, 마산 오동동에 위치한 태극당의

고로케나 팥빙수를 사먹었던것이 가장 큰 호사였다.

 

동생이 창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되어 기숙사를 나와 반송아파트를 전세내어 동생과 살게되었다.

방 두개 10평짜리 그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후배에게 작은방은 주고 난 동생과 한방을 사용

했는데, 지금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다.  당시 부모님도 기름보일러였는데, 난 도시에

살면서도 연탄보일러라 연탄을 갈아야했고, 꺼진연탄 피우느라 연탄연기도 많이 마셨다.

기숙사 나와서 살면서 아침마다 통근버스 정류장까지 달리기를 했다.

 

그렇게 미래를 위해 저축하며 알뜰하게 살았는데, 한해 여직원 세명이 운명을 달리하고

(한명은 23살 꽃다운나이에 갑짜기 백혈병에 걸렸고, 한명은 함께 근무하는 후배친구로

함께 회사 산악회와 함께 여름휴가갔다 설악산에서 갑짜기 호우가쏟아져 실족사했고,

또 한명은 직장다니며 어렵게 야간대학까지 졸업했는데 간염에 합병증을 앓았다) 나서

나에게도 미래가 없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되었다.

충격과 함께 내 생활을 반성하게 되었고,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의 내 삶에 가치를 두고,

그동안 내일로 미루어두었던 하고싶었던 일들을 하나하나씩 하면서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기시작했다.

 

노태우정부로 바뀌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우리회사도 급여가 조금씩 인상되기

시작하였고,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해마다 두자리씩 급여가 인상되었고, 년말에

특별 성과금도 지급되면서부터 내 형편이 풀리기 시작했다. 

몇년뒤 여동생이 합류하게되어 기름보일러가 설치된 주공15평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를 했다.

내 급여도 많이 올랐고, 적금탄것도 많았고, 부모님들도 빚을 다 갚아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래 가끔씩 조이너스같은 브렌드 옷을 사 입기도하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여행도 많이다녔다

 

처음 입사할적에 4,000명이 넘는 직원중 자가운전자가 50명도 안되었는데(주로 포니)

내가 퇴사할때엔 차 없는 직원들이 별로 없었고 여직원들도 차가 있었고,

그리고 꿈의 숫자 20만원의 10배가 넘는 돈을 받을때도 있었다.

첫 해외방문인 일본에서 내가 얼마나 우물안의 개구리였는지 깨닫았기에,

국내여행뿐만아니라 해외까지 무대를 넓혔다.

결혼전에 미국에 사는 친구집과 동부와 서부를 다녀왔기에 그렉과의 결혼을

결정하는것도 어렵지 않았던것 같다.

 

이 모든것들이 결혼을 늦게해 직장생활을 오래했기에 가능한것이라 참 아이러니 하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속담에도 있듯, 맏딸로서 실질적인 물주노릇에다, 농번기땐 주말마다

가서 일해주며 나름대로 자식된 도리를 다했는데, 결혼을 늦게하는 바람에

졸지에 부모님 근심의 근원이 되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엄마는 사람들 많은곳에 가면 꼭 내 결혼소식을

묻기에 사람들 많은곳에 갈수가 없다면서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셨다.

다른 부모들은 다들 자기 자식이 최고인줄 아는데 너무 겸손해서 탈인 내 부모님들은

내 짧은 학력과 내세울것 없는 집안 배경과 출충하지못한 외모와 많은 나이까지 나열하면서 

늦은 결혼이 주재도 모르고 눈만높은 내 잘못인양 말씀하시며 성화셨기에, 난 마음이 상해

남들 놀러 다닐때, 맨날 일하러오라고해 사람만날 기회가 없었다며 부모님을 탓 하기도했다.

 

난 더이상 안내양이 꿈이었던 시골뜨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결혼의 중요성에 대해

부모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고, 남은 인생을 좌우하는 그 중요한 결혼을 부모님은 별사람없다며

대충하라고 하실때마다 속이 상했다.   

 

예전엔 부모 복이 반복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온복이라고 한다.

그래도 나보다 훨씬 똑똑했는데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고등학교도 못간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난 불평할수가 없다.

그리고 평생 남한테 거짓말하지 않고 성실하고, 검소하게 사신 부모님덕분에

그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고 결혼전 몇년동안 화려한 싱걸을 보낼수 있었고,

또 물질에 대한 감사함을 알게되었으니 부모복이 없다고 할수 없다.

부모복이 많았거나,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터였니

난 부모복을 적당히 타고 난것 같다.

 

2010. 2. 11.  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