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미국에서 보통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미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나와 가족들

촌뜨기에서 세계인으로

앤드류 엄마 2010. 2. 11. 17:11

시골학교라 취업문이 넓지 않았다.  괜찮은 직장들은 여직원들도 학교추천후 공채를 했는데, 

취업담당 선생님이 열심히 문을 두드렸지만, 시골학교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첫번째로 도전한 현대중공업은 내가 가장 못하는 영어시험이 포함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뿐이라 이름적는것외엔 문제의 내용도 모르니 낙방한 당연지사.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은 타자와 일반상식 그리고 면접만 보았는데, 운좋게 합격되었다.

 

우리사무실은 바다건너로 돝섬과 마산시와 무학산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본관건물 7층에 있었어

너무좋았다(다른 곳은 공장들과 기숙사건물들만 보이기에).

바다를 보면서 기분전환도하고, 해가 짧은 겨울엔 마산시 야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기도했다. 

   

출근해보니 우리사무실엔 두살많은 언니와 나를 제외하곤 다 남자직원들뿐이었다. 

중공업회사라 경리부, 인사부, 노무부, MIS (컴퓨터)등 몇개부서만 제외하고, 대부분 부서에

여직원이 한두명뿐이기에 직원이 4,000명 정도되는데 여직원은 200명 정도 뿐이었다.

회사가 외딴곳에 위치해 일반일과의 접촉이 없는데다 여직원들이 많지 않으니 다들 

여직원들에게 잘해주었다.  

남자들속에서 일하는것이 여자들이 많은곳에서 일하는것보다 몸도 마음도 편하다는것을 그때

알았다.  남자들이 잘 도와주는데다, 여자들끼리의 미묘한 신경전이 없기에.

 

신입생 환영회를 부서장님이 총각사원과 여사원들만 함께 하게 했다.

경양식집이 아닌 양식집에서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선경지명이 있었던 고종덕분에

촌티나지 않게 우아하게 먹을수 있었다.

고종이 취직하게되면 양식집에도 가게 될거라며 고등학교때 부산의 양분식집에서 990짜리

돈가스를 사주면서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사무직의 직급이 여직원, 고졸 6급, 전문대졸 5급, 대졸 4급,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대우,

이사(나중엔 이사대우와 이사직급이 폐지되었다), 상무로 이어지고, 사무실에서 호칭은 5, 4급은

기사라 부르는데, 난 처음에 사람들이 백기사, 박기사하길래 사무실에 왠 운전기사가 이리도

많은가싶었다. 

 

우리사무실 부서원들은 대부분 공대출신들이라 여직원이 가장 말단이었지만, 다들 여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그런데 함께 근무하는 언니가 자기일까지 나한테 다 맡겨서, 혼자서 두사람일을 하니 일이 엄청

많았는데, 전망좋은 곳에서 여름엔 에어컨이 나오고, 겨울엔 난방이 잘되는 곳에서 근무하는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그많은 일들을 다했다.

그래도 가끔씩 너무 힘들었을땐 주말에 집에가서 햇볕아래서 하루종일 일하고 오면, 우리부모님보단

내일이 훨씬 쉬운일이라는 마음을 다져 먹었고, 겨울엔 어시장에 가서 그 추운곳에서 

굴까고, 새우까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물건사라고 목청껏 왜치는 시장 아주머니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

부모님들이 걱정할까봐 한번도 힘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내 생활에 대해서도 시시콜콜 말하지않았다.

그래도 부서장님은 나를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는지 잘해 주셨다.

취업담당인 우리담임선생님이 회사에와서 부서장님께 인사드렸을때, 부서장님께서 담임선생님과

나에게 저녁을 사주시기도 했고, 과장님급이상 회식이나 부부동반 모임에도 꼭 나를 참석시켜

주셨다 (외모도 안되고, 애교도없었으니 술자리 장식용이 아니라 좋은 음식 사주시려고).

그리고 부서장님의 배려로 제주도에 사시는 부모님집에서 친구들과 여름휴가동안 묶었는데, 

부서장님의 아버님께서 차량과 운전기사님을 보내주어서 제주 일주까지 시켜주셨다.

책을 좋아하시는 부서장님 덕분에 책도 참 많이 읽었다.  먼저 읽어시고 나한테 주셨기에.

여직원들의 요청에의해 시작된 순환보직으로 설계실가기전까지 근 8년을 모시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일본에 연수갔을때 다른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는도 금일봉을 챙겨주셨다.

인덕이 많은신 그분은 현재 중견기업에 부회장님으로 계신데, 한중 OB 출신중 가장 성공한분이

되셨다.  여전히 밥사주겠다며 꼭 연락하라 하신다.

부서장님외에도 엘리트에다 잰틀맨이셨던 과장님덕분에 출근하는것이 즐거웠다.

 

당시 우리회사가 창원공단내에서 손꼽히는 회사였기에 대부분의 선배언니이 용모가 특출했고,

다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못갔지만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라 배울점이 많았다. 

그래 사내결혼 비율이 50%가 넘었는데, 많은사람들이 결혼할때 고졸학력으로 인해 시댁에서 반대가 

심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결혼후엔 성실하고 착한데다, 어렵게자라 살림까지 알뜰하고 시부모

잘 섬기니 다들 인정받고 잘 살고 있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알뜰하다.

난 회사에서 오랫동안 촌뜨기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눈치가 없었어 가끔씩 언니들의 구박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그 오랜시간을 함께 하면서 함께한 추억들이 많았기에, 여전히 가까운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들이 많다.

 

창원시 귀산동 555번지에 위치한 한국중공업에서 꽃다운 20대를 다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한국중공업은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참 고마운직장이었다.

12년동안 근무하면서 모범사원에 뽑혀 난 생 처음 일본으로 해외연수도 가고, 단체협상 반대

주모자로 몰려 출하관리부로 유배도 갔지만, 시골뜨기, 쓰잘데없는 계집애에서 벗어나 세상보는

시야를 키워준 곳이고, 앨리트에 인품까지 갖춘 멋진분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내 선의가 때론 주위사람에게 폐를 끼칠수있다는것을 그때 배웠다.

내가 화장실에 있을때, 함께 근무하던 후배가 친구에게 내가 너무 열심히 일을해서 자기와 비교가

된다며 불평하는 말을 듣고는 Team-work 을 미쳐 헤아리지 못한 내 불찰을 깨달았다.

난 직장인으로서 열심히 일한것 뿐인데,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했다.

그 이후로 난 혼자서 튀지는 안는지 한번쯤 살피는 지혜를 가지게되었다.

 

그리고 80년대 말 들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노동운동의 현장을 함께하며 불평등에 눈을 뜨고,

회사에서 유일하게 진급제가 없었던 여사원들의 진급제를 만들었고,

그 많은 회사일을 하면서 그전까지 이름뿐인 유명무실했던 여사원단체를 맡아 

여사원들이 피부로 느끼는 조직으로 만들기위해,단체를 바르게 이끌기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고민하면서 인간 심리와 리디쉽을 배우기도했다.

그 많은 남자직원들에게 무서운여직원이라는 강성이미지로 각인되어 사내연애는 꿈도 못꾸고,

결혼이 늦어졌지만, 주위사람들은 나의 참 모습을 알아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설계실에서 근무할때 우리부서장님은 대한민국최고학부를 나온 엘리트였는데다 훌륭한 인품까지

갖추었기에 진심으로 존경했는데 나중에 말단 여사원인 나로 인해 사장님께 불려가 많은 질책을

받았기에 혹시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기도했는데, 회사에서 인재를 알아보고

그해 승진하셔서 많이 기뻤다 (내색을 하지 않으셨기에 모르고 있었는데, 전 부서장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부서장님은 현재 부사장님으로 재직중이시다. 

부서마다 대부분 1년에 한두번씩 가족동반 야유회를 가게되는데, 남편보다 더 직위가 높은것처럼

행세하는 꼴부견들이 사모님들이 많았기에 여직원들이 모이면 그런분들 흉을 보곤했는데,

사모님은 소녀처럼 수줍음이 많은 분으로 참으로 겸손하시고, 재와덕을 겸비한 현모양처셨다.

명절땐 꼭 나한테 선물을 챙겨주시곤했는데, 지금도 한국가면 여전히 맛있는 밥사주고, 선물이나

용돈을 챙겨주신다.  언제 이 은혜를 다 갚을지. 

 

설계실에서 일련의 사건으로 현장의 출하관리부사무실로 유배가지전까지 2년간 근무했는데,

젠틀맨에다 앨리트였던 멋진분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참 좋았는데, 인연이 너무 짧아 많이 아쉬웠다.

내 잘못이었지만.  잦은 술자리만큼 정이 많이 들었고, 그분들과의 시간은 여전히 즐겁다.

   

좋은 직장은 월급이 많은곳이 아니라 회사내의 주위환경은 개인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에

기업문화와 인적구성원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좋은 직장에서 좋은 분들과

오랫동안 근무해서 큰 행운이었고, 그 행운을 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엄마는 늘 내 대학에 못보낸것이 한스럽다고 하시는데,

내가 만약 대학에 갔으면 난 운동권으로 빠졌을거고,

지금도 운동권의 편양된 시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터이기에

난 직장에서 대학에서 배운것 못지 않게 인생에있어 소중한것들을 체험으로 배웠기에

지금 내게 주어진것에 감사하며, 대학 가지 못한것을 별로 원망하지않았다.

누구나 대학가는 학력인플레션시대에 살면서 고졸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긴했지만.

 

결혼후 몇년동안은 가끔씩 회사에서 일하던 꿈을 꾸곤 했다.

예전에 존경하던 분들이 다들 승진하시어서 직장인들의 별인 임원급이 되었고, 

좋아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근무하고 있기에, 비록 주인은 바뀌었지만,

두산중공업이 번창해서 그분들이 오랫동안 근무하게 되기를

늘 기원한다.

 

2010. 2. 10 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