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미국에서 보통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미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생각 나누기

행복했던 설날을 추억하며

앤드류 엄마 2013. 2. 11. 01:00

 

 

모든것이 귀했던 내 어린 시절,

설날은 1년중 최고의 날로 해가 바뀌어 새 달력을 달고난 그날부터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던 최고의 명절이었다.    

(추석은 가을추수때라 제사만 지내고 다를 들에 일을 하러가야 했고,

바빠서 제사음식외 특별한 음식도 하지 않았기에 설날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설날이 다가오면 할머니와 엄마는 동네 친척들과함께 집에서 조청, 유과, 강정, 엿을 만들었고,

난 호기심도 있었지만 달콤한 조청이 먹고 싶어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옆에서 조청이 다 되기를

기다렸다 (염불보단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던지 만드는 과정은 기억이 나질 않네^^).

어른들이 걸거치니 (방해되니) 밖에 나가 놀아라고 했지만, 난 그때만 잠깐 떨어져 앉았다간

다시 옆으로 바짝다가가 자리를 지켜, 조청이 다 되었는지 맛을 볼때 나도 새끼 손가락으로

그 달콤한 조청 맛도 보고, 나중에 조청이 다되어 조청 한종지를 얻고는 입이 찢어졌다.   

어느해엔가는 조청을 먹다가, 충치먹은 이빨이 아프기 시작해 조청대신 소주를 입에 머금어

통증을 삭히며, 댤콤한 조청의 유혹에 애를 태우기도 했다.

 

맛있는 유과는 만들기가 어려운데다 손이 많이가, 손님상에만 올라갔고 (할아버지가 계셔서 

우리집엔 손님이 많았다), 우리에겐 강정만 허락되었기에 난 호시탐탐 유과에 눈독을 들이곤했다. 

그런 유과는 설날이 한참지나서 손님들이 다 다녀가시고 난뒤에야 우리 차지가 되었는데

그땐 유과가 이미 눅진해진 뒤였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그리고 몇년후엔 엄마가 엿만드는것을 배워, 그동안 먹고 싶었던 엿을 실컷 먹었다.  

그러나 내가 철들고 부턴 엿, 유과, 도토리 묵, 두부등을 만들때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알기에

엄마하테 그런것 안먹으면 되니 제발하지 말라며 말리곤했다.

 

어린시절 난 대구에서 좀 사는 친척언니의 옷을 얻어 입었고, 

딱 일년에 두번, 설날과 추석 명절때면 새옷을 입을수 있었다.  

새옷은 주로 할아버지께서 대목장날 장에서 사오셨는데,

우리가 자랄것을 생각해 항상 한두살 큰 사이즈라 소매걷고, 바지단 올리고도 커서 우장방우같았지만 

그래도 귀한 새옷이라 설 전날밤까지 매일 밤바다 입어보며 설날아침을 기다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설날,

아직 해가 뜨지않아 어두컴컴한 새벽부터 일어나 새옷을 입고 좋아서 낄낄거렸고,

할아버지께 세배드리는것을 순서로 할머니, 아버지, 삼촌 순으로 세배를 드리고,

너무 추워서 귀가 어는것 같았고 하얀 입김을 쏟으면서도 신이나 동네 친척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올렸고, 친구들에게 새옷 자랑을 하곤했다.  (초기엔 가족들만 세배돈을 주었고,

동네 친척어른들은 우리가 초등학교 2,3학년때쯤부터 주신것 같은데,

어릴땐 세배돈을 주시지 않으셨어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어른들께 세배하는것이 좋았다).

설날엔 또 평소에 내가 손자가 아니라 손주라 탐탁치 않는데다,  조신하지 못하고

왈가닥 선머슴아같아서 나를 보시면 꾸중을 하시거나 혀를 차셨던 할아버지께서

그날만큼은 덕담을 해주셨고, 나무라지 않으셨기에 더 신이 났다.

 

지금은 옆에 있어도 건강을 생각해 먹지 않을 조청과 엿이고,

이제 옷은 너무 흔해서 선물로 주면 아이들이 반가와 하지도 않는 물건인데

그시절 모든것이 귀했을때라 조청과 엿이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고,

장에서 산 싸구려 옷한벌 받고 몇날 몇일을 가슴 설레했으니, 

그 시절의 물질의 궁핍과 결핍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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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을때

설날이 다가오면 식구들 줄 선물을 사고, 내 선물받고 기뻐할 동생들 생각에,

또 오랫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난 또다시 어린시절처럼 

가슴설레며 설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설 전날 나도 귀성객이 되어, 회사 일마치고,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줄을

겨우 찾아 몇시간 기다리면서도 행복했고,  만원버스에 몸이 낀채 입석으로 가면서

발밑에 둔 선물들이 행여 다른사람들 발에 밟힐까 조바심이 났지만, 

보고싶은 사람들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민주화이후 월급이 쑥쑥 늘어 만원버스 대신 직장내 학교 후배들과 우리 사무실동료의

봉고차를 대절해서 가게되었고, 가족들 선물도 더 크고 좋은것을 살수 있었고,

사촌들에게도 용돈을 줄수있었어 기분이 좋았다. 

 

어릴땐 맛있는것 먹고, 귀한 새옷입어 설날이 좋았지만,

내가 직장생활을 하고나선 내가 가족들에게 선물을 주고, 용돈을 줄수 있었어

더 신이나고 즐거웠던것 같다.  

 

결혼을 미국남자와 해 한국의 시월드를 경험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수있겠지만

(결혼전 난 간크게도 종가집 종부가 되고 싶었다),내가 결혼을 늦게해 자랑스런 딸에서

집안의 애물떵어리로 전락했던 4번의 설날을 날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보낸 33번의 설날은이렇듯 나에게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들로 남아있다.

설날덕분에 소중한 추억을 가질수 있었고,

그 추억속에 가족이 함께해 참으로 고맙고 소중한 설날이다.

 

이젠 물질적으로 풍요해 아이들에게 설날은 그저 세배 돈받는 날 일 뿐이며, 

어른들에겐 명절증후군 유발시키는 불청객이거나, 지출을 생각하니 부담스런 날로 

전락하는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때 그들은 설날을 추억할때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게 될런지?

 

2013. 2. 10. (일) 경란

 

 

추석 :  설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아이들에게 설날이라고 설명해주고, 점심때 떡국을 먹었고,

          (남편과 앤드류가 닭국물로 만든 떡국을 좋아하니 주말에 떡국을 가끔씩 먹는다).     

          데이빗에게 내 어린시절 설날에 대해 말해주었더니, 녀석이 날 아주 불쌍한 눈으로 처다보았다. 

          그래 물건이 귀했기에 작은것에도 행복했으니 좋지 않느냐고 했더니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세배돈 줄테니 세배하라고 했을때 녀석들이 듣는둥 마는둥하더니 돈 밝히는 앤드류만 세배하고,

          데이빗녀석은 너무 늦었다며 내년에 한단다.  

         

          미국에선 설날이 휴일도 아니고해, 설날엔 그냥 평소처럼 지내며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 한국의 친척과 지인 어른들에게 안부전화를 드리는것이 전부였는데,

          어젠 문득 어린시절부터의 설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떠 올라, 밤늦게 그 마음을 글로 옮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