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부산 고모네는
전포동 황령산 중턱에 있는
작고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 시절 고모네는 결혼후 맨몸으로 도시로 와서
고모부님의 적은 월급으로
일곱식구들과 생계를 꾸리느라
참으로 가난했는데,
난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사촌들이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좋았고,
고모네가 한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고모네는 담장이 없었어
작은 마당으로 나오면
7,80년대 부산의 가장 중심지였던
서면이 바로 보였고,
밤엔 아름다운 야경을 볼수 있었다.
부산 고모네에 가려면
우리집에서 읍내까지 50분 걸어가서
몇 시간 직행버스 타고 다시 시내버스 타고 내려서
경사가 심했던 오르막길을 20분쯤 올라가야 했는데,
엄마는 고모네 갈때마다 농산물을 주어서
난 교복을 입고 양손에 농산물이 든
보자기나 포대를 들고 가야 했다.
그런데도 난 사촌들 만날 생각에 기뻐서
하나도 챙피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고모네에 얼마나 가고 싶었든지
가끔씩은 고모네 가는데,
그 오르막 길이 미끄럼틀 같아서
올라가면 미끄러져 내려오는 꿈을 꾸기도했다.
그 만큼 경사가 심했기에
쓰레기 차가 그곳까지 올라오는게 신기했고,
내려올때 싸구려 내 샌들 끈이 끊어질까
걱정이 되곤 했다.
조선시대 사고를 가진 호랑이 할아버지에게
억압받고 자라며 찌질했던 내 10대에
방학 한때나마 고모네에서 사촌들과함께했던
즐거웠던 시간들은 내 인생의 한줄기 빛이었다.
도시 사는 고모님과 고종사촌들은
우물안 시골 촌아이에게 사소한 문명과
새로운 경험들을 시켜 주었다.
내게 평생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 많아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물안 무지랭이 시골 촌아이가
부산 고모네에서 겪었던
사소한 문명 경험담들은
지금껏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있다.
농사를 지었던 우리 집은
우리 밭에 심었던 채소만 먹었기에
난 초등 6학년이 되도록 당근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고모는 시력이 좋지 않은 딸들을 위해
당근을 많이 사 왔는데,
당근을 먹는 사촌들을 보고는
나는 당근이 빨간색이라 빨간 고추가 매운 것처럼
메운 줄로 알고는
큼직한 당근을 먹는 사촌들을 보고는 놀래서
맵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사촌들을 웃게 만들었다.
당근이니 당은 달다는 의미인데
그때까지 몰라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선 우물물로 세수할 때
세수 비누칠하고 두 번이면 얼굴이 빠뜻빠듯했는데
고모네에선 몇 번을 씻어도 계속 미끌거려
비누물이 남아 있는 줄 알고
눈을 감은체 계속 세수를 했더니
고모가 수돗물이라 미끌거리는 거라고.
부산 고모네가서 난생 처음으로 목욕탕도 갔고,
소포트 아이스크림을 초등학교 6학년때
처음 먹어봤다.
용두산 공원 아래 먹자골목에서
사촌언니가 사준 100원짜리 소포트 아이스크림,
처음 먹어본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반했다.
그리고 고모부님 덕분에
해수욕장도 사촌들과 처음으로 가보고,
12월 31일 마지막 날
엄청 굵은 엿을 먹으며 보냈던
마지막 밤도 내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난 도시 사람들은 다 회사에 다니는줄 알았는데
부산에 갔더니 낮에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놀랬다.
그때 저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생계를 꾸리나
많이 궁금해었다.

내 최애 고모님과 사촌들과 함께 (5/23/23)
베트남 현지회사 사장님인 남편따라
베트남에서 살고있는 고모의 세쨋딸이
1년에 두차례씩 한국에 오기에
내 방문스케쥴을 미리 알려주어서
같은 시기에 한국을 방문해서 부산에서 만났다.
밤늦도록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했더니
고모님이 조용한데 우리 말소리가 커서
이웃들 방해할까봐 걱정을 하셨다.

부산 용궁사에서 고종사촌과
앤드류가 왔으니 구경시켜준다고.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유명해서인지
방문객들이 많았는데,
너무 상업화된 것 같아 좀 씁쓸했다.
위 사진의 내 고종은 같은 학년으로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고모네 갔더니
중학교 가면 영어를 배우니
공부하자며 영어 단어를 외우게 하고선
둘이서 단어 시험을 치기고.
그때 외웠던 클리브랜드가 지금껏 유독 생각난다.
클리블랜드는 미국의 도시인데,
스펠링을 외워야 되는 줄로. ㅋㅋ
혜화여고를 졸업하고,
부산 사범대학에 갈 내 고종과는 달리
난 시골 여상을 다니고 있었다.
고 3 겨울방학 때 고모네 갔을때
저 고종이 네가 취직하면 레스토랑에도 가게될테니
나이프와 포크 사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43년이 지난 지금껏 그 이름도 잊히지 않는
코끼리 양분식에 날 데려가서
990짜리 돈가스를 사주며
나이프와 포크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에 가난해서 용돈을 쪼끔밖에 못 받았을 텐데,
그 용돈 아껴서 내게 돈가스를 사준
고종 덕분에 그때 난 생전 처음으로 돈까스를 먹어보았고,
정식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내 신입사원 환영회 때
내가 생각해도 근사하게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었다.
*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한번도 용돈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
레스토랑에 가게되면 함께 간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곤하는데,
앞으로도 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이들에게 하게 될것 같다.
미국 와서 보니 우리가 가정책에서 배웠던
양식코스와 나이프와 포크 사용법은
(전체요리, 수프, 샐러드, 메인코스, 디저트 순,
포크와 나이프는 바깥쪽 순서대로)
거의 불필요한 교육에 가까왔다.
엄청 특별한날 코스요리 먹게되면
순서대로 배달해주고,
포크, 나이프 사용법 모르면
눈치껏 옆사람 보고 따라하면 된다.
그리고 보통은 레스토랑 가면
스프와 샐러드 중 하나 선택해야 하고,
심지어 스프나 셀러드가 점심 끼니에 해당되기도.
또 메인 음식이 량이 많아서
전체요리격인 에피타이즈는 대부분 생략하고,
나이프 사용하지 않고 포크로만 사용하기도.
그리고 고종이 내게 사준 수정전골 또한 잊을수가 없다.

용궁사

나와 앤드류가 좋아해서 호떡집 보고 반가웠는데
3,000원짜리 호떡 안에 내용물이 빈약해서 약간 실망

입과 눈이 즐거웠던 시간들 - 기장
앤드류가 무엇이든 잘 먹어서 좋았다.


기장의 카페에서
해변가에 예쁜 카페들이 많았다.

가난했던 그 옛날과 달리 사촌들도 여유가 있었어
맛있는 해물집과 아름다운 카페를 찾아다니며
멀리서 온 우리 모자를 환영해 주었다.
고모는 고모부의 수입으로
딸 넷에 아들 한 명을 키우며
딸을 대학까지 보낼 형편이 못되었기에
여상에 보내려고 했지만,
고종이 공부를 특히 잘했기에
자식을 이기지 못하셨다.
딸들이 대학에 떨어졌으면 했다고.
여자는 똑똑하면 집안의 분란만 만드는데
없는 네 형편에 씰데없는 딸을 대학에 보낸다고
내 할아버지에게 고모가 욕을 많이 들어셨다.
고모는 어려운 살림과 학비에 보태려고
온갖일을 하시며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학비가 싸고 취직이 보장되는
부산 사범대학과 부산대 영문과를 졸업한
딸들 덕분에
또 부산에 사는 정 많은 막내딸 덕분에
노후를 잘 보내고 계셔서 좋았다.
부산 고모는 쌍둥이로 태어나 둘째지만,
아버지에겐 엄마같은 큰 누나 였다.
내 할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는데,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이긴 커녕
며느리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켜
힘든 농사일을 하며 어린 아이들 키워야 하는
올케와 방치된 조카들이 애처롭게 보였던지
본인도 아이가 다섯이나 되고,
형편도 어려운데,
농번기때면 내 바로 아래 남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어렸을때
본인 집으로 데려가 키워주셨다.
그리고 장손 교육에 열성이셨던
할아버지는 장손이자 둘째인 내 남동생을
형편어려운 고모네에 6년씩이나 맡겨
고모가 남동생을 키워주시기도.
고모님이 애살도 많고, 배움에 대한 열망도 높으셔서
난 내 부모님보다 고모를 더 많이 닮은것 같고,
말도 엄마보다 고모님과 더 잘 통한다.
내가 사십대 중반에 뒤늦게 커뮤니티 칼리지에 갔을때
내 엄만 너가 나이가 몇인데
무슨 학교를 다니냐고 타박을 하셨지만,
내 고모는 장하다며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한다고
격려와 칭찬을 해 주셨고,
한글 학교에서 한글배우셔서 내게 편지를 써서 보내주셨다.
89세이신데 한번씩 카톡 답장을 보내주신다.
그래 난 부산고모와 가깝고 늘 감사한 마음이있다.
두 고모님이 회갑때 내 부모님과 같이
우리집에 오셔서
큰차 빌려서 함께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 난 20개월, 4개월된 아이들이 있었어
미흡한 점이 많았기에 아쉽곤하다.
한국에 5년 살땐 진해 군항제 구경시켜드리고,
부모님과 베이징과 계림 (구이린)과
후쿠오카 여행할때 고모님도 함께 모시고 가
조금이라도 고마움을 갚을수 있었어 다행이다.
다음 일정때문에 아쉽게 작별을 해야 했는데,
작별할때 고모님께선
친정 질녀와 조카들중 나를 가장 좋아하시기에
다음에 언제 너를 또 만날수 있을까 하시며
눈시울을 붉혀셨다.
고모님이 연세가 있으시지만 마지막이 아닐꺼라
난 편안하게 작별인사를 드릴수 있었다.
다음에 뵐때까지 건강하시길.
2025. 3. 16. (일) 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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