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엄마

미국에서 보통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미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일상에서

한국생활 5년동안 얻은것과 잃은것

앤드류 엄마 2010. 1. 8. 01:15

어느새 한국에서 돌아온지 일년이 되었다.
미국살다 한국갔으니, 돌아온것인데도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색한것은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것이 아닐까?

한국가기전까진 부지런히 일기를 적었는데, 한국생활은 11시를 넘겨 잘때가
많았지만 일기를 적을 여유가 없었다.
돌아오고나서야 수첩에 그날 일과에 대한 간단한 메로라도 남기지 않았던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달력에 빼곡히 일정들을 적어서는 아무생각없이
달력을 버렸기에) 그래 5년동안의 일들을 기록하는것은 무리라,
인물별로 기록하려고 노트를 구입해 앞표지에 "2000 - 2005년"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이라 적고서는 아직도 그대로 있다.

아마 이 글로 대신해야 할것 같다.

먼저 얻은것을 생각해보니,
첫째가 융자없이 집을 구입한것이 아닌가 싶다.
은행융자받아선 2.5%되는 Proprety 세금내며 이동네 살수가 없을것같다.
집 융자금 지출을 하지않기에, 여유는 없지만 아이들학교 자원봉사하면서
전업주부로 지낼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돈때문에 취직해야 했어면 내 무능력이 남편이나 아이들한테 더 미안했을테니.

운이 없어서 인지, 한국가 있는 5년동안 이자률이 너무 낮아 은행에
저축해둔 쥐꼬리만한 이자수입에 비해, 이집은 전주인이 5년전에 구입할때보다
65% 나 인상된 금액에 구입해야했다.
예전집은 그곳으로 돌아갈수없기에 팔고갔는데, 그곳의 집값은 20%정도 밖에 오르지 않았았단다.
그런데 우리가 집을 산이후 이곳 집값이 10% 정도 떨어진데다, 매물로
나온집들이 많아 가끔씩 속이 쓰리지만, 정남향인데다 이웃들이 좋아
집을 비싸게 산 것보다 우리 이웃이 더 가치가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한다.

누구 말처럼 돈도 사랑도 쫒아가면 도망가니, 따라오게 해야한다는데,
우린 그런 재주는 없지만 남편이나 나나 농촌출신으로 엄청 근검절약하는
부모밑에서 자랐기에 절약할줄알고 분수맞게 사는법을 알기에,
큰돈은 없지만 경제적인 압박없이 살수있으니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그리고 두번째가 남편이 한국의 풍습이나 한국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먼저 식사비 낼줄도 알고)
아이들도 자신의 반쪽 나라인 한국에서 살면서 배운것이 많았을것 같다.
큰아인 한국어로 말하고, 읽고, 쓰기가 가능하고,
두녀석다 김치, 된장을 비롯 한국음식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여동생과는 7살 차이가 나기에 내가 고등학교다닐때 여동생은 겨우 초등학생인
관계로 별로 가깝지 않았는데, 둘다 아이엄마가되고 나니 공통분모가
많아서인지 더 가까와진것 같다.
돌아올땐 좀 더 자주 맛있는것도 사주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했지만.

맏딸로 오랫동안 직장생활하며 집안의 기둥역할을하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버려 상실감이 큰 부모님한테 5년동안 조금이나마
그 상실감을 들어드릴수 있었어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가족이 한국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어쩌다 몇년만에 아이들데리고
방문하게되면, 우리부모님도 아이들도 서로 말도 통하지 않아 더 낯설었을
텐데, 5년간이었지만 친정부모님이 외손자들 성장하는것을 지켜볼수 있었고,
앞으로 몇년에 한번씩 뵐수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바쁠때마다 일손도와주러 갔기에, 지금도 아이들이 덥다고 하면
난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여름에 고추따고, 참깨농사짖느라 밭에서
일하시는것을 보았잖아 하면서 왜 농사일은 더워도 해야하는지 설명해주고,
땀의 댓가가 얼마되지않는것 까지 설명하게 된다.
자동적으로 공부열심히해라로 귀결되지만.

그리고 난 결혼전엔 직장다니다 결혼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왔기에
한국의 주부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었는데, 한국생활 5년동안 한국 아줌마들의
세계에서 살면서 얼마나 좋았던지.(특히 등산과 밤마실)
남편이 미국가면 할수 없으니 한국살때 하고싶은일 다해라고 협조해주었기에
가능했지만.

창원은 결혼전에 13년동안 직장생활을 한곳인데다, 워낙 사람을 좋아해
아는사람이 많은데다, 친정과 1시간거리고 동생들도 다 창원에 살고있다.
그래 가는날 부터 점심먹자는 전화가 불이났다.
한국에 계속 살았으면 거절하지못했을텐데, 미국살면서 미국사람들의
정확한 Yes, No 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정치할것도 아닌데,
나 만나고 싶다는 사람 다 만났다가는 우리가정이 엉망이 될것 같아서
(셋다 한국말도 못하기에 나만 처다보고 있는데) 내가 만나고싶은사람들만
개별이 아닌 그룹으로 만나면서 최소화 시켰다. (친구들한테 핀잔도 들었지만)
미국은 모르는사람들끼리도 파티나 모임에서 편하게 지내기에,
나도 미국식으로 우리집에 다 오라고 해 한꺼번해 만나고싶었는데,
다들 낯선사람들과는 불편하단다.

처음엔 2년만 생각했기에, 2년뒤에 미국으로 돌아갈건데다 맺고끊는것을
잘하지 못하기에, 한번 인연을 맺으면 계속 연락을 해야하기에 미리
새로운 인연을 맺지 않으려고 무진장 자제했는데도
내일새벽이면 떠나는 그날 저녁까지 한달내 송별회다녀야했다.

이사짐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 돌아오고 나서야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살던 아파트는 남편 후임자가 와서 살기에 아파트를 깨끗이 비운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남긴것이 많았는데, 우리가 가져와야할것 까지 두고
온것이 많았다. 밥먹지 말고 차라리 집에와서 이삿짐정리하는거나 도와달라고
할것을.

혹 나중에 친구나 나 아는사람들중에 이 글을 읽게되면 자기 이름빠졌다고
서운해 할수도 있지만, 다 나열할수는 없기에 양해해주길 바라며,(그때처음
만난 사람들에 한해 쓴 글임)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해야 할것같아 적어본다.

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좋아한다. 또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도.
그래 내 개인적으로 이분들은 한국생활 5년동안 얻은 가장 소중한 보물인것
같다.

이사해서 처음만난 이웃이 규태엄마였다.
첫인상부터 어찌나 조신한지, 양가집 규수같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규태엄만, 맵씨있게 개량한복입고 외출할때면 사람들이 한번 더 처다본다.
마음씨까지 얼마나 후덕한지, 그 까탈스러운 시어머니밑에서 시집살이까지
하고도 시부모한테 잘하는것보면 나이는 나보다 적지만 존경스럽다.
수시로 내려오는 부침개며, 가재나 게넣고 끓인 된장찌게, 카레등으로
우리집 저녁준비는 밥만 하면 되었고, 아침이나 점심도 잠깐 볼일보러
갔다가 해결할때 부지수였다.
거울같이 집안정리해놓고, 자원봉사하러 바쁘게 다니더니 어느새
미용자격증까지 취득해, 미용실에 실습다니다가 미용실까지 차렸다.
여자도 자기 일이 있어야하는데, 월급받는일은 나이들면 못하기에
나이들어서도 가능한 일을 찾은것이 미용이라고, 그리고 봉사활동하기도 좋고.
처음엔 경력이 짧아 은근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뿌린것이 많아서인지
가끔씩 전화하면 그런대로 괜찮다고 한다.
저러다 건강잃게될까 항상 걱정스럽다.
제발 무리하지 말고 자기 몸도 좀 생각해야하는데.

그리고 우리보다 몇달뒤에 제주도에서 이사온 상우엄마.
상우가 앤드류랑 같은나이라 쉽게 친해졌다.
태어나서 제주도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뭍으로 나왔단다.
그래 제주바다가 너무 그립고, 친구들이 너무 그립다며 가끔씩 향수에
젖는 상우엄마한테 내가 "미국사는 날 위안삼으라고",
"1시간 거리에 살아도 몇년동안 한번도 못만났다며, 가까이 있는 친구들
사귀며 지내라고" 했더니, 상우엄마가 "1시간 거리에 사는데 몇년씩이나
만나지 않는다면 친구맞나" 그랬지. 그말듣고 친구한테 미안해
몇칠뒤에 시간내어 친구를 만났지.

상우엄마가 3박 3일동안 아이들을 봐준 덕분에 MBC 라디오 여성시대가
주체한 "가을주부 나들이" 도 다녀왔다.
평소 좋아했던 양희은씨도 직접보고 유명가수들의 콘스트와 전국에서 모인
아줌마들도 수다로 정말 좋은 추억을 만들을수 있었다.
나보고 언니 가고나면 나 어떡게 하더니, 자기가 먼저 남편직장땜에 시흥으로
이사갔다. 미국오기전에 들러 몇일지낼수 있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친정엄마 같으신 옆집 사모님은 쓸데없이 바빠 집안이 엉망인 우리집을
수시로 치워주셨고, 급히 아이들을 부탁해야할땐 아침이든 저녁이든
언제든지 우리아이들을 봐 주셨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우리아이들한테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더 살갑게 하셨다.
(친정부모님은 손자,손녀가 5명인데다, 함께 갈때가 많았기에)
하나뿐인 손녀딸 하은이가 서울에 살기에 자주보지 못해
항상 허전해하셨는데, 우리까지 미국으로 떠나 많이도 서운해 하셨다.
그 아파트도 회사소유인데, 사장님께서 이제 회사를 퇴직하시게되어서
이사가게 되었는데, 양곡이 좋아 양곡에서 사실거라고.

친정언니같은 조성려언니는 가족모두 영어가 되니 두가족이 다함께
가깝게 지냈다.
아저씬 또 남편이랑 생일이 같은날이라 생일파티도 함께했다.
우리가 미국오기 2년전에 아저씨가 동경지점장으로 발령나
동경에서 하룻밤 짧은 재회를 했다.
좋은아버지상을 수상한 분 답게 모범적인 가정을 가진 언니네 가족과
가까이 지내며 내가 배운것만큼 남편도 배운것이 있으리라.

점심때 반찬이 없든지, 혼자먹기 싫든지 하면 이사람들에게 전화 한통화면
해결되었던 양곡아파트 그때가 많이 그립다.

한국은 작고 시끄러운나라지만 인정이 있어 살만한 나라인데,
요즘은 도시 아파트사는 사람들중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사람들이
많다니 참 안타깝다.

그렇기에 정많고 사람좋은 이웃들을 만난것은 참으로 큰 행운인것 같다.

큰아이랑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같은반이었던 희진이 엄마,
젊은 엄마들 틈에서 몇안되는 같은또래인데 자녀교육관이나 가치관이
비슷해 의기투합이 잘되었다.
유치원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그 집 가족모두 조선시대 선비집안
사람들같다고 했는데 제대로 한 표현인것 같다.
요즘 아이들같지않은 한효와 희진이 그리고 그 부모들, 닮고 싶은 가정이다.

앤드류가 2학년 학기초에 전학온 진만인 곧 앤드류와 단짝이 되었다.
그래서 친해진 진만이 엄만, 아이들한테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친구가
되어주고, 아이들에게 문을 항상 개방해 놓았기에 아이들이 끊이지가 않았다.
만남은 짧았지만, 서로의 진실이 통해서인지 정이 많이 들었다.
미국올때 나에 대해 쓴 일기와 편지로 책을 만들어 주어 얼마나 감격했는지.
살면서 이렇게 까지 내 생각을 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그리고 우리들만의 비밀스런 사연과 추억이 만았던 연수와 은영, 그리고 양언.
평소에 어리지만 참 괜찮은 엄마들이네하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셋 모임에
초대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첫만남만큼 여전히 만날때마다 기분좋은사람들.

인라인스케이트를 가르쳐주신 안정숙 선생님.
이름처럼 정숙하고, 조신하신 선생님이 무료봉사로 인라인타는것을 기초부터
제대로 가르쳐주어서, 아이스스케이트랑 스키도 바로 탈수있었다.
나이가 어리다며 제발 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시는데,
난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편하니 참. (호칭은 상대가 희망하는 대로 사용해야
하는것이 예의인데)

짧은 만남인데도 여운이 오래남고, 예전부터 친했던 친구처럼 느껴지는것은
서로 진심이 통해서 그런것인것같다.
친구는 오래될수도 좋다고 했는데, 새로운 친구는 또 나름대로 좋은것같다.

적다 보니 이사람들이 다들 공통적으로 다 현모양처인것 같다.
내가 닮고 싶었던 사람들이라 더 가깝게 지냈나 보다.

나이롱 신자며, 같은교회 교인도 아닌데 (우린 남편과 아이들땜에 미 해군
부대네 교회를 다녔슴) 구역예배에 참여시켜주셔서, 늘 기도해주시고,
금요일마다 좋은 말씀과 함께 한정식 전문식당보다 더 맛있는 음식들을
베푸신 박순자 권사님과 양곡구역식구들, 교회에서 찬송할때, 한국교인들과
한달에 한번 속회할때 생각이 나곤한다.

우리 아파트 청소를 하시던 김무연 아주머니.
늘 인자하신 미소로 인사해주시며, 누가 보든 상관없이 묵묵히 청소하시는
그분의 모습에서 친정엄마를 떠 올린다.

웅남동 2003년 웅남동문화센타 개장과 함께 도서관과 주민들의 취미, 문화교실
을 맡으신 이무희 선생님은 동민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시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정적으로 일해 동민들은 창원시 변방인
신촌동에 살면서 조금이나마 문화혜택을 누릴수 있게 되었고, 신촌도
조금씩 살기 좋은 동네가 되어갔다.
선생님덕분에 한국에 사는동안 꼭 가보고 싶었던 보성 녹차밭과, 담양,
소쇄원등을 동네 아주머니들이랑 함께 테마탐방을 통해 다녀올수 있었다.

주민으로서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내 아이들이 있기에 마음만큼
몸이 따라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나마 도서관 도우미로 시작된 들마루를 통해 조금이나마 도와드릴수있어
위안이되고, 들마루 회원들과 함께 한 시간들도 추억의 한장으로 남는다.

두아이 유치원 담임을 몇년간 맡으셨던 강희정 선생님,
한국어도 모르는 두아이 땜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집에가서 한.영사전 찾아 공부하셨다고.
점심시간에 멸치반찬을 보고 뼈 빼달라고 했다나.
(우리집은 작은 멸치를 먹었는데, 유치원 멸치가 조금 컸나보다)
그리고 깻잎보고 "왜 나뭇잎 먹어라고 해" 했다나.
선생님 덕분에 큰아인 유치원 졸업할때 한국아이가 다 되었다.
선생님은 지난해 수녀님이 되시려고 수도원에 들어가셨다.
다음에 만나면 글로리아 수녀님이라 불러야 할텐데,
강선생님이 먼저 나올것 같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좋은 수녀님으로 성장하시길 기도드린다.

그리고 열정많고, 천사같은 데레사, 카타리나 두분 원장수녀님,
차량봉사관계로 가끔씩 수녀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함께 하게되었는데,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이 시간을 저에게 허락해주어서 감사합니다란
말이 적당한 표현이리라.
우리 앤드류와 데이빗을 위해 항상 기도드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두산중공업 부사장님사모님과 상무님 사모님.
예전 저의 부서장님과 부서과장님의 사모님이셨는데, 같은 동에 살게되었다.
항상 겸손하시고 따뜻하신 두분께서 제게 참 많은 것을 주셨다.
훌륭한 자녀교육과 주부로서의 지혜로움 배울것이 많은 분들이었기에,
서울로 전근가시게되어 이사가셨기에 짧은 만남이 많이 아쉬운분들이다.

끝으로 너무착해서 가슴아팠던 기영엄마와 석준이엄마를 비롯한 샛별어린이집에서 만난 엄마들과 양곡사람들.
행정구역상 창원이지만 위치가 창원, 마산, 진해의 중간지역에 있는데다
창원시의 지원과 혜택에서 떨어진듯 시골스러워 주민들이 신촌면이라 비하할
때도 있지만, 난 그곳 사람들과 뒷산, 그리고 가까이 있는 장복산이 너무좋았
기에 혹시라도 먼훗날 한국에 다시가게되면 양곡에서 살고싶다.

난 가끔씩 이 소중한분들과 시카코 미술관과 박물관, 미시건호수 유람선,
시내배회하는날을 꿈구며, 오헤어 공항에서 재회하기를 손꼽아기다린다

아직도 남은 사람들과 이야기들은 많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5년간 얻은것은 이것으로 정리할까한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미국학교 1년을 마쳤다.

결론은 한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곳에 아이들을 적응시키는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내가 규제를 덜했는데다, 이웃들도 처음엔 말이통하지않아
녀석이 울어버리니 우리아이들한테 먼저 양보했고, 나중엔 미국가니 양보해
주어라고 해, 다른아이이 먼저 양보해주었고, 유치원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기에 적응시킨다고 한국아이들보단 자유롭게 해줘 버릇이 나빠졌다.

그 나쁜 버릇이 습관이 되어 1년동안 녀석도, 담임도, 나도 힘든 한해였다.

(큰아이가 미국에서 Pre school 1년을 마치고 갔는데, 미국의 Pre school 은
많이 자유스럽지만 한국은 줄서고 단체행동을 많이 시켜 규제가 심하다)


난 선생님한테 내 아이 잘봐 달라고 부탁하는 한국의 치마바람
일으키는 엄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것은 아이에게 독이 된다는것을 알기에.

작은아이 데이빗은 한국유치원를 다니다, 1학년시작되는 9월부터
미 군부대네 있는 학교에 다녔다.
그때까지 녀석은 한국말로도 영어로도 또래들보다 언어표현수준이 많이 ]
떨어지는데다,사회성까지 없어 내심 약간의 자폐가 아닐까 걱정을하면서도,
아마 아이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그럴수도 있고, 남편도 어릴땐 엄청
내성적이었기에 말을 잘 하게되면 나아지리라고 애써 걱정을 떨쳤다.

남편회사에서 학비지원을 했지만, 학비가 1년에 $16,600 나 되어
유치원부터 다니려니 회사에도 미안하기도 하고, 1학년은 쉽기에
1학년만 다니면 언어가 해결될것 같았다.

학교는 전교생이 26명이라 합반수업을 했다.
유치원생 3명과, 1학년은 데이빗혼자, 2학년 2명이 한반에서 수업을 했다.
데이빗을 제외하곤 다들 베이스에 살아 아이들끼리 친구였고,
남자아인 2학년에 한명있고, 4명이 여자아이였는데, 데이빗이 말이
정확하지 않는데다, 군인 가족이 아니기에 여자아이들이 데이빗을
따돌렸다. 그래 데이빗은 화가나 아이들을 밀치고 해 맨 교장실에서가 있었다.
그래도 학교다니고나서부턴 말이 엄청 많이 늘었고, 표정도 밝아졌다.
그런데 여름방학전에 학교에서 데이빗은 언어치료가 필요한데,
학교가 작아 언어치료를 제공할수가 없는데, 미국 교육법상 언어치료가
필요한 학생한테 언어치료를 하지 않으면 불법이기에 2학기부터 받을수가
없다고 하면서 교장선생님께서 여름방학동안 자기도 알아볼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이 군 교육주무부서와 백악관 민원실로
이메일을 보냈는데, 회답이 없었다.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만
그렇게 되었다.
이럴줄알았으면 진작에 미국으로 왔을텐데,
그 비싼학비내고 학교에서 툇자 맞을줄이야.
남편은 후임자를 구해 인수인계하고, 남편도 미국에 자리가 비어야
올수 있기에 곧장 올수가 없었다.
그래 데이빗은 6개월동안 나랑 집에 있었기에 또 퇴화되었고
미국와서 다시 1학년을 시작했다.

데이빗 담임선생님은 매일 학습태도를 스티크로 표시해 주었는데,
데이빗은 잘했을때 받는 초록색 스티크가 일주일에 몇개되지 않고,
선생님의 메모가 있었다.
그리고 Social 치료를 1주일에 30분씩 한차례 받았는데,
걱정한대로 약간의 자폐가 있다고 했다.

Social worker 가 데이빗은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조금씩 나아질거라고
했다. 난 1년정도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 질것 같다.

학교에서 주 3회씩 언어치료를 받아 처음왔을때보단 발음이 많이 좋아졌고,
코치와 팀원들에게 미안했지만 부지런히 운동클럽에 가입해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엄마 마음만큼 진척되지 않는것 같다.
녀석을 보면 한국에서 더 일찍 돌아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불쑥불쑥들어
녀석한테 미안한 마음이 항상 남아있다.

앤드류는 한국간지 6개월쯤되니 한국아이들이랑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고,
1년 지나선 유치원 수업을 대부분 따라 갔기에, 학교다녀도 수업을
따라갈수 있을것 같아 한국어로 수업을 더 많이 받는것이 나을것같아
한국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어휘력 구사에서 한국아이들보다 떨어지기에 성적은 좋지않았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난 나도 초등학교때 공부를 별로 잘하지 않았기에.

2학년을 마치고 1월부터는 적응기간이 필요할것 같아 미군부대 학교에 보냈다.
영어모르는 한국아이들도 미국가면 적응기간 거치고 괜찮아 지지만,
아빠가 미국사람인데, 미국에서 ESL 수업을 받게되면 녀석도, 우리도
선생님한테 챙피할것 같아 반학기 미리 적응훈련 시키는것이 나을것 같아서.

녀석은 나이기준으로 3학년으로 들어가야하는데, 미군학교에서 하필 3학년이
학생수가 가장많아 단일 학년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담임선생님이 자긴
아이들이 너무 많아 못받겠다고 해, 예전 데이빗반에 들어갔다.
키는 5학년 수준인데, 유치원생들과 같은 반이라니, 군가족이 아니니 뭐.
수학은 너무 쉽기에 수학만 3학년 교실로 이동수업을 했다.
그래 미국와 3학년 건너뛰고 4학년으로 들어갔기에, 선생님께 미리
앤드류에 대해 말씀드렸다. .
읽기와 쓰기가 좀 떨어지지만, 못하는 아이들보단 낫다며ESL 은 안해도된다고.
근데 녀석도 수업시간에 산만해, 학급자원봉사가서 보면 수시로 호명되었다.

녀석들이 생활이나 학습태도가 좋지 않기에 미국오면 그것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쁜줄은 몰랐기에 한국에서 뭐했나 하는 후회를했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고, 오래된 습관을 고치려면 더 힘들기에,
하루라도 빨리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할것같아, 지난 1년동안 녀석들 나쁜습관
고치는데 목표를 두었기에 하루하루 편안할 날이 없었는데,
몇년간 몸에 베인 습관을 고치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고 시간도 오래걸리는것같다.

인생사 얻는것이 있으면 잃는것이 있기 마련이라,
얻는것이 잃는것보다 많으면 잃은것을 회복할수있는데,
그 잃는것이 자식에 관해서라면 얻는것이 아무리 크도 잃는것이
더 클수밖에 없을것 같다.
5년동안의 한국생활이 우리가족에게 좋은 추억으로만 기억되려면
하루빨리 녀석들의 생활습관들이 제대로 고쳐지고,
데이빗의 사회성이 좋아져야 할것 같다.

데이빗이 언제쯤이면 나에게 면죄부를 줄수있을지?

언제쯤이면 내가 늘 부러워하는 미국엄마들처럼 남들 앞에서 교양있는
엄마노릇을 할수있을지?

엄마도 자상하고, 품위있고, 교양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
제발 협조 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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