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한국에 다니러 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많이 우울해 보일길래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었다.
그 사람은 캐나다에 사는 사람으로, 홍콩에서 혼자 사시는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해서 갔는데,
한달째 계속 그대로라 캐나다에서 기다리는 가족들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수가 없어 돌아가는 길이라며,
이젠 아버지가 돌아 가셔도 다시 갈수가 없다며 울먹였다.
그말을 듣고나니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 나도 가족들이 모두 한국에 살고, 나 혼자 미국에 살고 있기에 언제가
당신같은 경우가 생길수도 있을것 같다며, 가족들과 떨어져 해외에 사는 사람들이
겪게되는 아픔이고 슬픔인것 같다는 말을 해주고나니 나또한 우울해졌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몇년뒤 나도 그분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엄만 아버지께서 내가 가기전까지 살아계실런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하셨기에
도착할때까지 많이 불안했다.
그런데 아버진 그동안 나를 학수고대하며 삶에 강한 애착을 가지신데다
나를 만나는 반가움때문이었는지 병원에서 뵌 아버진 환자복만 입지 않으면
말기암환자 같지가 않았다.
사람들도 아버지의 얼굴살과 체중이 오랜 병세에도 불구하고 다른환자들처럼 줄지않아
병세보단 얼굴이 좋다고들 했는데, 아버진 평소에도 얼굴에 살이 없었신데다
평생을 힘든 농사일을 하셨기에 지방이 거의없고 근육질이라 다른환자들보다
체중감소가 늦게 진행되는것 같다.
그때까지 말씀도 하시고, 아주 소량이었지만 식사도 하셨기에, 내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면
함께 말씀도 하시곤했는데, 조금씩 상태가 악화되면서 말씀도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아버진 통증도 심해지고,
당신이 지금 가야지 내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갈텐데라고 하셨다.
대부분 암환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이 맑다고, 아버지한테서 직접 그말을 들어니 가슴이 미어졌다.
당신이 그런 마음을 가져셔서 그런지 혀도 올라가고, 그동안 드시던 미음도 못 삼키겠다며,
물만 아이들 약컵으로 조금씩 드시면서 (여동생과 통화했더니 여동생이 어제 마시는 요쿠르트와
비타 500을 드렸드니 물처럼 드셨단다. 난 그런줄도 모르고 물만 드렸으니... )
주무시기 전에 하느님께 오늘밤 자는동안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드리시곤 했다.
그리고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잦아지자 더이상 생명을 연장시키는것을 원치 않는다며
의사에게 수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돌아오기 일주일전부턴 당신이 아무래도 오늘밤을 못넘길것같다며 불안해하시기에
엄마와 내가 밤에 아버지 옆에서 자겠다고 했더니 좋아하셨다(그전까지 밤엔 간병인만 있었다).
돌아와야 할 날은 점점 가까와오자 난 출국을 연기해야 할지 그대로 출국해야 할지
너무 고민스러웠다.
아버지의 상태를 감안하면 생이 얼마남지 않은것 같은데,
사람마다 다 다른데다, 어떤분들은 위급상황을 몇번이나 넘기고하니
장례식을 마치고 오려면 언제가 될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 뻔한 답을 알면서도 의사 선생님께 물었더니 하느님만 아신단다
내가 출국을 연기하고 아버지 병상을 지키는것이 꼭 아버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는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는것도 너무 괴롭기도했지만,
우리집 사정이 출장중인 남편은 이번 주말에나 돌아오고, 남편출장동안 아이들을 돌봐주셨던
시어머니가 이번 주말에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관계로 몇일은 연기할수가 있지만
일주일을 연기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 하려고 아버지께 물었더니 가라고 하셨다.
자녀들이 해외에 거주하는 집이 많다보니 비행기에서 만난 캐나다인처럼 나와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사람은 기다리다 기다리다가 출국했더니 비행기탔을때 돌아가셨던 분도 계시고 (핸드폰이 없었을때),
몇번의 연장끝에 내일이면 출국해야하는데, 오지 못하는 큰아들 기다리느라 세상의 끈을 놓지않아
결국 큰아들 오지 못한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내일 출국해야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돌아가셨다는 분도 계셨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살아도 국내에 산다면 집에 갔다 위급하면 다시 돌아올수 있지만
해외사는 사람들에겐 오고가고가 싶지 않은데다, 아이들이 어중간한 나이일때 많이 남감하다.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해외에 살면서 겪는 고충이 한둘이 아니지만,
마음과달리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는것도 해외사는 사람들이 겪게되는
크나큰 아픔이고 슬픔인것 같다.
남편이 그동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어서 내가 설사 장례식에 참석 못하게 되더라도
혼자 남은 엄마가 힘들테니 다음주에 다시가서 엄마와 함께 있어주라고한다.
그래 오는 10월 3일(월) 2 주일 일정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우리집 근처에 주말 이틀동안 도움받을 사람이 있었어면 돌아오지 않고 연기할수 있었는데...
내가 돌아오기 마지막날 밤엔 아버지께서 20분마다 물을 찾으셨고,
30분 간격으로 통증을 호소하시고, 1시간 간격으로 누운 자세를 변경시켜 달라고 하셨는데,
지난 이틀전에 20분간격으로 통증을 호소하셨고, 가래제거를 위해 그렇게 싫어하셨던 기계를 원하신단다.
아버진 많이 불안하셨는지, 이틀전엔 엄마와, 여동생, 남동생들을 찾아 모두들 급히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의 한시간 한시간이 고통스러우시니 내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지금이라도 가셨으면 좋겠다.
아버지한테 내가 다시 간다고 말씀드리면 또 고통을 참으시며 날 기다리실테니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여동생이 벌써 알려드렸단다.
엄만 아버지께서 그때까지 돌아가시지 않을것 같다고 하시고,
다른사람들은 아버지께서 2주일도 더 사실수도 있으시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다.
시차는 바로 극복했는데, 한밤중에 몇번씩 깨게되고, 3주째 잠을 재대로 못잔탓인지
왠종일 머리가 띵하다.
2011. 6. 27. (화) 경란
추신 : 창원 파티마 병원내 은혜병동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깨끗한 환경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분들은 다들 참 친절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들인것 같다.
매일 교대로 환자들을 찾아와 목욕과 이발봉사, 발마사지등도
해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시는 자원봉사자님들과
매일 아침 저녁으로 병실로 환자들을 방문해 기도도 해주시는 이송자 그라시아 수녀님과
불안한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상담도 해주시고 많은 위안을 주는 박기애 복지사님,
그리고 항상 수줍은듯한 미소로 딸처럼 친근하고 정답게 환자들을 돌봐주는 간호사님들께
이지면을 빌어 다시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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